혐한 공동 대응

중공군 조선족의 한국 전쟁 만행ㅡ혐한 정서 원인

평범한 한국인들 2025. 6. 13. 12:09

 

ㅡ왜 영국과 프랑스는 2차 대전 이전에 우유부단하게 굴었나? 이해 안 간다.

ㅡ이해 안 갈 것도 없이 간단하죠. 다시 또 세계대전이 벌어진다면 수백만이 무장하게 될 겁니다. 게다가 승전국도 사회적 혼란을 겪었죠, 러시아 혁명,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 독일 혁명... "당시에는 코민테른 같은 유독한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죠. 그러나 지금은 존재할 뿐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전쟁을 내전으로 바꿔 지급된 무기를 자국의 부르주아지를 향해 돌려야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체 누가 세계대전에 기꺼이 휩쓸리려 하겠습니까?!"

누구와 누구의 문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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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유령 | 조너선 해슬럼 - 교보문고

전쟁의 유령 | 세계는 어떻게 전쟁의 구렁텅이에 휘말리는가?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그러나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제2차 세계대전 발화의 비밀 ★한국어판 저자 서문 수록★첫 번째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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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소련 대사와 체코의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 간 대화입니다. 각국 정치인들의 실제 언행을 거론하면서, 문재인 스타일 유체이탈 화법에는 날카로운 평가도 곁들이는 조너선 해슬럼은, 체코 대통령의 이 말은 정답 인정을 하고 만점을 줍니다. 그로서는 보기 드문 극찬을 한 사례입니다.

실제로, 소련은 체코의 우방이었고, 독소 불가침 조약 이후 체코와의 협력 관계를 헌신짝처럼 버렸죠. 이 책을 추천하는 진보들이 소련이 무시당했고 왕따당했다고 실로 프로파간다 워를 해댔지만, 실제 책의 내용은 소련이야말로 독일과, 프랑스와, 체코와 각기 협정을 맺었고, 오히려 영국과 프랑스를 갈라놓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물론 소련이 유럽과 체결한 수많은 협정 중 지킨 건 독소 불가침 조약뿐이었죠.

게다가 유럽 각국의 재무장을 소련이 자금 지원한 각국 공산당이 평화를 외치며 반대했습니다. 독일 공산당은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한다면서, 그 조약에 금지된 독일 재무장도 반대하는 유체이탈 화법 정도가 아니라 주장을 전개했고, 그 결과 히틀러에게만 유리했죠. 소련이 없었으면 2차 대전 못 이겼다는 소리가 성립한다면, 소련이 없었으면 2차 대전이 안 일어났다는 소리도 성립합니다. 당장 자국 선거도 총파업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각국 정치와 경제에 분란을 일으키며 뒤흔드는 소련 공산당이 혁명도 아닌 소련 국익을 위해 종속시키지 않았으면, 나치보다 더 많았던 공산당들이 패하지도 않았을 테고요.

이 책의 추천사나 광고의 발췌를 보면, 전부 전체 역사나 저자의 주장과 무관하게 자신들의 주장에 도움 되는 내용만 리영희 스타일로 골라낸 겁니다. 우리는 그들에 반대되는 내용을 지난 시리즈에서 더 많이 증명했고 모자라다면 얼마든지 더 할 자신이 있습니다. 제목부터가 반공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가 이차대전의 원인이었다고 말하는 책 전체가 그들 주장의 반증이니까요.

그리고 이 유구한 리영희식 역사 왜곡은 조선족 중공군의 진실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혐중 정서가 나치 유태인 학살이라고 진보 언론마다 떠들어 대는데, 실제 벌어지는 증오 범죄는 한국인이 피해자니, 우리야말로 비현실적인 정도가 아니라 초현실주의 진보의 허위의식에 맞서 혐한 정서와 친중 감수성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 삼단 논법 학살자 리영희 스타일에 따라 살인 저지른 가해자가 유태인이고 피해자가 나치라는 건가, 참으로 진보다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입니다. 원에서 산책하거나 낮잠만 자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중국인 조선족에게 칼 맞는 것도 모자라, 무시해서 그랬다는 식으로 누명까지 뒤집어 쓰고, 죽은 건 한국인인데 살인자들 피해만 초점 맞추는 가짜 인도주의자 혐한인들의 만행을 더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미 북한군으로 남한을 쓸어버리고도 아닌 척하는 조선족.

 

제일 빨리 한강을 도하해서 서울 점령하고 호남까지 내려온 조선족 군대.

그런데도 조선족이 이미 북한군 중공군으로 침략해서 남한 안 쓸어 버린 것처럼 거짓말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걸 위해서죠. 조선족이 한국을 침략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쏙 빼놓고, 이미 한국 가서 한국 사람과 싸워서 양민 학살 등 온갖 전쟁 범죄 잔뜩 저지른 주제에, 그런 걸 안 했다는 조선족 거짓말만 잔뜩 싣습니다. 정말 일본 우익만큼이나 한국사를 날조하는 이런 가짜뉴스들이 한중 관계를 영원히 이간질하는 거죠. 이런 세뇌 당하니까 지난 포스팅에서 보수 학자조차 중공군에게 미안하다고 굽신댔던 겁니다.

중공군 침략으로 한국 통일 기회 날아간 것, 중공군 인민군이 한국에 저지른 그 모든 전쟁 범죄를 두고 한국이 사과라도 요구했습니까? 과거라고 한민족이라고 덮어주고 수교하고 받아줬더니, 그 과거대로 다시 한번 침략하겠다고, 전쟁 없는 지금도 한국인 목숨이라면 인간 이하로 취급하고 배은망덕하게 구는 건 자신들이면서,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또다시 남한을 침략하겠다고 말합니까? 과연 그 조상에 그 후손입니다.

심지어 반중 정서도 한국의 죄라고 누명 씌웁니다.

https://www.ekw.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232

 

한국사회에서 왜 자꾸 '반중정서'가 커지나? - EKW이코리아월드(동포세계신문)

[뉴스분석=EKW) 김용필 기자=한국사회에서 반중정서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 최근 언론 보도에 난 상황들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것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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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뉴스보도를 볼 때, 한국사회에서 반중정서가 생기는 근본원인은 정부차원의 대응책 미비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합당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ㅡ본인들 말에 본인들이 반증을 제공하는 혐한인 특징이 이 신문에도 역력하니, 조선족 중국인의 혐한 정서와 증오범죄가 아니라 정부 차원의 대응책 미비가 반중 정서 원인이라면서 정작 불체자 단속만 해도 길길이 날뛰는 행태를 여실히 보이고 있습니다. 과연 조선족들이 인터넷서 조선족 자치국이라고 대놓고 부르는 대림동답네요. 중국인도 그런 소리는 안 하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중국인. 중국인보다 더 중국스러운 중국인 그 자체.

https://www.ekw.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75

 

[재한조선족] 단속 칼바람 맞는 대림동 위기, 20년전 가리봉동을 생각해본다 - EKW이코리아월드(동

유튜브방송으로 보기법무부가 오는 6월 30일까지 불법체류자 합동단속을 실시한다고 한다. 이와 관련 6월 3일 유튜브방송에서 불법체류자 단속으로 대림동 상인들이 \'울상\'이라는 분위기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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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 기사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지 않으면, 한국이 좋아서, 한국에 와서 열심히 생활하는 중국동포나 중국인들이 '반중정서'의 타켓이 되고 더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선족이 한국을 좋아한다니, 말도 안 되는 거짓말입니다. 항일투쟁은 무슨 애초에 일본 우익 뺨치는 혐한을 해대는 글을 쓴 것도 한국 장학금 받으면서 6년이나 한국에서 혐한이나 한 조선족 유학생이고, 그걸 널리 퍼뜨린 것도 바로 이 신문입니다.

https://www.ekw.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582

일본 혐한 서적들 표절이라도 했나 내용 똑같으니, 조선족 항일 투쟁 허위 증 그 자체입니다.

한국 망할 수밖에 없고, 한국 망해도 싸고, 한국 망해야 하고, 한국 멸망 소취단에 조선족이 그렇게나 많은데,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조선족의 증오범죄가 심해지니까 이제 와서 한국을 좋아한다고 거짓말하는 거죠. 조선족 중국인이 나치고 한국인이 유태인인 판인데 그것마저 가해자ㅡ피해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해대는 리영희 키즈들.

게다가 마지막 문장만 봐도 조선족 중국인들의 증오범죄 타겟이 된 한국인들에 대한 배려나 존중은, 이 신문이 퍼뜨리는 소위 조선족 명문의 저자 혐한인 조선족 유학생만큼이나 없죠. 보통은 한국인 피해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해야 하는 게 인간이 할 짓이 아닌가? 한국인을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긴 커녕 인간 이하로 취급하니까, 한국인들의 피해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피해도 안 당한 가해자 중국인 조선족의 있지도 않은 가상 피해만 주장합니다. 국뽕인 척 혐한 파는 판타지 웹소 그 자체네요.

https://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5309

 

[발굴추적] 6·25 인민군은 사실상 팔로군이었다 - 미래한국 Weekly

1950년 7월 25일 23시 육군본부는 영남관구 편성사령관 채병덕 소장에게 ‘긴급 작전명령 72호’를 하달했다. 긴급명령 내용은 간단했다.① 하동 방면으로 남하한 적은 1개 대대 규모이며 약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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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요청으로 모택동이 북한군에 편입시킨 조선인 팔로군은 10개 연대 규모였다. 이는 북한군 전체 병력의 거의 절반 규모였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 21개 보병연대 중 거의 절반인 10개 연대가 중국에서 건너온 조선족 팔로군부대였다.

이들 10개 연대가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 주력부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6·25전쟁은 사실상 중국 팔로군의 남침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휘관도 마찬가지다. 6사단장 방호산뿐만 아니라 1군단장인 김웅은 중국 팔로군 연대장 출신, 2군단장 김광협, 10사단장 이방남, 4사단 이권무, 5사단장 김창덕, 12사단장 최인 등 모두 중국 팔로군 출신이었다.

6·25전쟁에서 수도 서울을 함락시킨 주력부대였던 인민군 4사단은 1948년 10월 15일 완편 사단이 되는데 그 중 1개 연대는 중공군 팔로군이 그대로 북한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인민군 5사단은 조선인으로 구성된 중공군 164사단이 북한 인민군으로 재편된 사단이다.

조선족 중공군이란 말도 사실 틀린 게 조선족은 인민군 중공군 다 한 거죠.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39247

 

[남성욱의 평양리포트] 2024 갑진년, 1950년 경인년만큼 위험한가? - 월간중앙

새해 들어 김정은의 광기(狂氣)에 찬 발언으로 한반도에 긴장감이 높아졌다. 대중 강연 때마다 혹시 전쟁이 나는 것 아니냐는 질문도 심심찮게 나온다. 여기에 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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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국공(國共)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족 병력 4만여 명 등 총 20만 명의 병력이 전차를 앞세워 전면 남침을 감행했다.

당시 상당수의 조선족이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 참여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어진 3년간의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족들은 모두 6만 3000명에 달했다. 조선족 병사들은 조선의용군이라는 이름하에 국공내전에 참여해 실전 경험을 쌓았다. 국공내전이 끝난 후 중국 공산당의 조선족 부대들은 북한군의 정규 부대로 개편됐다. 중국 인민해방군 제166사는 북한군 6사단으로 개편됐다. 조선족이자 전쟁 초기 호남평야 점령에 공을 세웠던 정성인·방호산은 6사단장이었다. 조선족 부대는 6·25전쟁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실제로 남침의 최전선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https://www.epochtimes.kr/2021/06/587159.html

 

[칼럼] 6.25 한국전쟁과 조선족 병사의 참전 사실에 대하여

오는 2021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71주년을 맞는다. 공산화 야욕 때문에 동족이 싸운, 잊지 못할 비극이 일어난 날이다. 이젠 세월이 흘러 그때의 목격자, 경험한 이들이 점점 줄어가는 현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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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 기습 남침에서 중국 국공내전에서 장기간 전투경험을 쌓은 조선족 병사들이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민군으로 둔갑하여 파죽지세로 남한을 초토화하였다. 그중 166사단은 한국 남단의 전라도까지 밀고 내려갔다.

 

그럼 북침이라도 당했나 본데, 한국 국민도 모르는 한국의 기습 침략을 극복하고 3일 만에 남침해서 서울 점령한 위대한 조선족, 대단합니다. 한국인 너무 싫어해서 평화 시에도 한국인이라면 칼로 찔러 죽여버리는 것도 모자라, 무시해서 그랬다고 피해자에게 누명 씌우는 이차 가해를 자행하는 조선족, 정말 용감하지만, 선전전은 더 잘하네요. 프로파간다 워의 승자 납셨습니다. 박수!

그렇지만 조선족의 남침은 한국 경찰이 막아냅니다.

https://www.seoul.co.kr/news/plan/military-story/2021/06/27/20210627500016

 

‘北 6사단 미스터리’와 희생…잊지 않겠습니다 [밀리터리 인사이드]

‘경찰판 포화속으로’ 강경전투와 전투경찰의 헌신, 북한군, 개전 뒤 파죽지세 진격호남 점령하려 돌연 1주일 지연강경 등서 전투경찰 온 몸으로 방어‘여단급 방어’로 오판…공격로 우회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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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방호산은 결정적 실수를 하게 됩니다. 충청지역으로 진출한 뒤 전남 남원·순천, 경남 진주로 직행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돌아 목포와 여수를 점령하는데 3일 가량을 흘려보낸 겁니다. 또 충남 공주까지 진출했다가 세종시 전의면 지역으로 부대를 후퇴시켜 4일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북한군의 오판은 6·25 전쟁 최대 미스터리로 남았습니다. 워커 사령관조차 “북한군이 목포와 여수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면 전쟁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고 평가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미스터리 속엔 여러분이 잘 모르는 숨겨진 희생이 있었습니다.

●“북한군 우회 미스터리엔 전투경찰이 있었다”당시 호남지역엔 국군 정규군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충청, 호남 지역 전투경찰과 해병대원 일부, 징집자 등 급조한 군경 합동부대로 ‘7사단’을 꾸렸습니다.

이 때 강경읍을 지킨 분들은 정성봉 강경경찰서장과 220명의 경찰병력이었습니다.

북한군 6사단은 ‘기만전술’에 능했습니다. 교묘하게 30명을 ‘남한 유격대원’으로 꾸며 강경읍을 방어중인 경찰에 보냈습니다. 증명서를 본 경찰은 별다른 의심 없이 이들을 강경읍 외곽에 배치합니다.

병력 규모를 간파한 북한군 1연대는 7월 17일부터 강경읍을 포위해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당시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강경경찰서 앞 다리에서 북한군은 또 다시 “우리가 도우러 왔다”고 기만전술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경관 1명이 “속았다. 적이다”라고 외치면서 적탄에 쓰러졌고, 북한군은 강경읍사무소로 진출해 중기관총을 걸고 공격했습니다.

정 서장은 부대를 이끌고 30배 규모의 적에 맞섰습니다. 그러다 힘이 부치자 통신병 등 본부 병력을 후퇴시킨 뒤 30여명의 경찰대원과 차량을 타고 이동하다 강경중학교 근처에서 잠복했던 북한군에 의해 산화했습니다. 포로로 잡힌 경관 20명이 들판에서 학살되는 등 이 때 모두 83명이 전사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전북경찰과 충남경찰 혼성부대는 북한군이 강경읍을 침탈하는 것을 보고 차분히 이동경로를 분석해 외곽에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북한군 1연대가 나타나자 사격을 퍼부어 무려 10시간 동안 이동을 지연시키고 결국 적을 강경읍으로 후퇴시켰습니다. 이후 전력 열세로 익산으로 후퇴하면서도 온 힘을 다해 지연전을 펼쳤습니다.

●진주로 가는 길, 온 몸으로 막은 경찰들

경찰부대들은 청양, 서천, 장항, 김제, 정읍, 광주, 목포, 남원, 구례, 순천, 여수 등지에서도 잇따라 전투를 벌이며 적의 이동을 방해했습니다.

이 교수는 북한군 6사단을 막은 전투경찰들의 희생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교수는 “강경전투에서 경찰관 본인들은 몰랐겠지만, 6·25 전쟁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본다”며 “강경경찰이 강인한 전투의지와 불굴의 저항정신을 보여줬기 때문에 북한군 6사단의 진출이 강경에서 진주까지 15일이나 소요됐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파죽지세였던 북한군은 강경전투 뒤 진주까지 직진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우회하게 됩니다.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에프 중장은 강경전투에서 교전한 부대 규모를 ‘여단’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만큼 저항이 거셌다는 뜻입니다.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3021318292182697

하지만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던 ‘불독’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북한군 최정예 6사단이 호남에서 수일간 시간을 보낸 덕에 부산을 방어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호남에서 유례없이 신속하게 이동하던 북한군 6사단의 진군에 맞선 ‘지연 전투’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호남 전투경찰과 혈서를 쓰고 지원한 학도병이 바로 그들이다.

방호산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은 조선인 출신 또는 조선족 병사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의 4야전군 166사단이 그대로 북한으로 넘어가 재편된 부대로 국공내전과 항일전쟁 등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갖춘 북한군 최정예였다.

마산 전투는 처절하고 치열했다.

해발 740m의 서북산은 미군 전투일지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19차례 뺏고 빼앗기는 혈전을 치르는 동안 피아의 포탄과 미 공군의 네이팜탄으로 나무 한그루 남지 못할 지경이 됐다. 갓을 씌운 듯한 모양때문에 ‘갓더미산’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이 산을 오르며 미군들은 ‘갓댐잇(God Damm It,젠장…)’을 연발했고, 그래서 산의 별명은 ‘갓데미산’으로 바뀌었다. 북한 종군기자로 내려온 유명 작가 김사량은 서북산 고지를 점령한 뒤 쓴 종군기에서 “바다가 보인다. 동남쪽 끝 항구 부산항도 여기서 얼마 멀지를 않으니 우리들의 귀중한 조국 땅을 고스란히 끌어안을 때도 거의 임박하였다.저 아름다운 남해바다도 우리들의 것이다”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김사량의 감격은 오래 가지 못했다. 마산방어전투는 북한군 전사자 4000명, 포로 3000명, 미군ㆍ국군 전사자 1000명, 부상자 5000명을 낸 끝에 인천상륙작전으로 공수가 전환되면서 막을 내렸다. 미군 25사단은 9월 18일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막아내고 26일 진주를 수복했다.

끝까지 북한의 공세를 저지한 건 미 25사단이었으나 초기에 주둔했던 김성은 대령의 국군 해병대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귀신잡는 해병대란 말의 어원은 진동리 전투의 전과를 보고 미군이 찬사를 보낸 데서 나온 것이다.

ㅡ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도 번영도 이렇게 목숨 바쳐 치열하게 싸운 사람들의 희생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진보는 그렇게 침략에 맞서 싸운 전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목숨 바쳐 지킬 가치가 없으니 망해도 싸고 망해야 하고 망할 만하고 망할 수밖에 없고~ 온갖 한국 멸망 소취단 구호의 사상적 토대를 알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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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범죄 : 알라딘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의 본질을 말하는 책. 여기서 다루는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의 사실은 대부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저자는 각 학살사건을 종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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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민간인 학살은 극심했습니다. 사실이고 역사입니다. 우리는 리영희처럼 중국만 나오면 과학적 비판은커녕 상반된 의견이 나오니까 알 수도 없는 일을 두고 따지는 건 무익하고 무의미하는 식의 비겁한 현실 부정은 안 합니다.

그런데 사실을 나열하며 잘 나가다 또 진보 특유의 내로남불이 나옵니다.

하지만 인민군 측에 의한 민간인 피해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민간인의 안위나 치안은 아랑곳없이 오직 실적만을 추구한 결과가 아닐까?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조사를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 피해는 적어도 무정부상태를 방치한 전략의 결과로 볼 수 있다.

ㅡ전쟁 중인데 기습 침략한 적군이 저지르는 민간인 학살이 줄어들지 않은 게, 아군이 민간인 안위는 아랑곳없이 실적을 추구한 결과라면, 아군이 적군을 후퇴시키지 않고 싸움을 중지했어야 합니까? 점령했을 때도 학살 잘만 저질러서 사진 찍고 영상 찍어가서 돌려보고 아주 난리가 났는데? 그걸 왜 무정부 상태를 방치한 전략의 결과라고 아군의 잘못이라는 식으로 누명 씌웁니까? 무정부 상태를 방치하지 않는 전략이 대체 뭔데요? 한반도에 전쟁 없이 가장 나쁜 평화와 더러운 평화 이루면 되는 겁니까?

이러니까 이승만 정부며 국군과 미군과 우익이 저지른 온갖 끔찍한 학살도 다 사실이라고 동의하며 보다가도, 진보 특유 역사관만 나오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는 겁니다. 이러니까 진보의 중국 보는 시각이 아직도 구닥다리 리영희와 케케묵은 에드가 스노우를 극복 못하죠. 유시민까지 에드가 스노우 베껴서 팔아먹는 건 진짜 진보 학자의 품격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맨날 한국 수준 운운하면서 근거 대라면, 공부하고 오세요~밖에 못하는 진보는 너희가 지적 스승으로 떠받드는 구루들 수준이나 걱정해 진짜. 차라리 보험사기를 당하지 지적사기를 당하면 평생 경계성 지능이다.

결론은 지금의 한국 사회가 1950년의 규범에서 얼마나 진보해 있는지, 전쟁범죄의 유산을 얼마나 극복했는지 보여준다.

전혀 진보하고 극복하지 않았으니, 한국이 망할 수밖에 없다면, 진보는 왜 정권을 잡았는가? 진보는 한국 사회 구성원이 아니어서 자신들의 책임은 자연스레 배제하고, 피해국 국민들을 꾸짖고 훈계하는 나르시시스트 스승의 위치에 올라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의 대부분은 이승만 정부의 전쟁범죄였다.

이건 못 믿겠습니다. 애초에 북한과 중국이 저지른 전쟁 범죄는 진보가 제대로 다루지 않고, 이 책부터가 사실상 분량도 리영희 스타일로 적게 할애한데다가 적군의 책임도 아까 발췌처럼 아군의 책임으로 돌리는데, 저자의 판단에 대한 신뢰를 저자 스스로 망쳤으니까요.

이 극단적인 야만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국가보안법이라는 초헌법 악법이 그대로 남아 있고 이를 집행하는 기관이 국민의 세금을 기반으로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헌법적 기관인 검찰과 형법에 의해 국가 안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를 통해 14,000명이 전쟁에 부수된 피해가 아니라 의도된 살해였음을 확인했다. 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어떤 죽음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글쓴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걸가? 은폐를 기도하는 국가,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 이들을 방관하는 사회가 있는 한 진실을 위한 싸움 역시 계속될 수밖에 없다.

ㅡ바로 이래서 문재인은 가장 나쁜 평화를 주장했고, 이재명은 더러운 평화를 주장하는 겁니다. 또 침략당해도 진보의 가장 나쁘고 가장 더러운 평화를 위해 맞서 싸우지 않으면, 전쟁은 없을 테니까요. 진보식 평화는 가장 달성하기 쉬워요. 나라 팔면 되니까. 평화가 아니라 점령인 거죠. 가짜 평화.

그러나 진보 눈에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게 가짜 평화란 겁니다. 그때 적화통일이 됐어야 했는데 안 돼서 조선족 중공군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감히 소련이며 중국같은 공산대국에 맞서 싸운 한국인이 창피하고, 한국인인 것이 부끄러운 겁니다. 한국인은 무슨, 혐한인이면서.

하지만 북한군과 중공군 전쟁 만행도 끔찍했습니다.

이렇게 전세가 역전되면서 조선족 군대가 후퇴하자, 바로 전쟁 범죄를 일으킵니다.

붙잡은 경찰관 23명에 대한 인민재판 전 총살을 강요하는 선동행렬. 국가기록원

ㅡ앞서 기사에 나온 증거 자료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7Hw0-DjXkc

인민재판 받으러 끌려가는 남한 양민들입니다.
 

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 사례로 일컬어지는 전북 옥구군 미면의 경우, 9월 27~29일 사이에 ‘반동분자 및 그 가족’574명이 학살되었다. 이 사건에서 9월 27일과 28일 이틀간 미면 신풍리에서 학살된 66명 중에는 24명의 여자와 4세의 어린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4)

여수에서는 1950년 9월 27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던 인민군과 내무서원(지방좌익 포함)이 내무서 수감자를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수감자 197명 중 일부를 석방하고 150여 명은 순천으로 호송하여 “재심석방”한다는 구실로 포박한 다음, 도보로 미평(美評)에 이르렀을 때 과수원과 그 일대의 둔덕재, 둔덕재 아래 벽돌공장 주변에서 총살하였다.(6) 순천에서도 역시 9월 27일 순천내무서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 내무서 뒤뜰에서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7)

그에 따라 9월 20일부터 각 지역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학살된 사람들은 대부분 20~40대의 남자들이었고, 일부 군 포로들도 그 대상이 되었다.

▲ 미군 한국전쟁범죄조사단보고서(KWC)#1668 중 현장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9월 20일경 수감자들에 대한 조치가 내려졌는데, ‘북으로 후송하거나 후송이 불가능하면 현지에서 적당히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시에 따라 각 지방에서는 형무소 또는 산중으로 끌고 가서 대부분 학살하였다.

군당의 지시를 받은 면당과 리(동)의 좌익조직은 정치범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주변사람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미 대사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9월 17일에서 28일 사이에 서울에서 1만~2만 명의 정치범들이 행방불명되었는데,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의정부와 춘천을 향해 이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미 대사관 직원과 해병대원들은 약 50명씩 그룹을 지어 매장되어 있는 약 1천구 정도의 시체더미를 발굴하였는데, 이들은 정치범들로 북으로 납북되어 가던 도중에 병이 들어 도보이동이 불편하거나 이동가치가 없다고 여겨져 처형된 것으로 판단되었다.(11)

미대사관 직원들은 경기도 양평의 한강 둑에서 9월 27일에서 30일 사이에 살해당한 정치범 시체 800구를 확인하였다. 9월 30일 유엔한국위원회 조사단 1개 팀이 서울의 학살현장을 조사했는데 발견된 시체는 모두 정치범들로 서울이 탈환되자 북한군이 이들을 마당에 집결시켜 총살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대전형무소(대전교화소), 프란치스코 수도원(정치보위부), 대전경찰서(대전내무서) 등에서 1,500요명이 학살되었다.

이들 중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충남 각 지역에서 끌려온 우익인사들로서 1950년 9월 25~26일 형무소 내 밭고랑과 우물, 인근의 용두사, 도마리, 탄방리 등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정치보위부(프란체스코 수도원)에 수감된 희생자들은 주로 외국인, 종교인 등으로서 목동성당, 수도원, 용두산 등에서 총살되었다. 대전내무서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미군, 한국군 포로와 경찰들로서 9월 27일 새벽에 경찰서 마당에서 총살되었다.

또한 전주형무소에서도 9월 26~27일에 인민군과 형무소장과 간수, 지방좌익 등에 의해 최소한 수백 명에서 최대한 1천여 명의 우익인사들이 학살되었다.(14) 전남에서도 300명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무안에서는 퇴각하는 인민군이 80여명의 주민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고 한다.(15) 전남 임자도에서는 전체 주민의 반 이상이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16) 미군은 9월 28일부터 10월 4일 사이에 약 5,000~7,000명의 민간인, 17명의 국군, 400여 명의 미군이 살해되었다고 밝혔다.

1950년 9월 27일 새벽 충남 서천군 서천등기소 창고에서 좌익세력에 의해 240~250명가량이 학살되었다. 이 사건은 희생자들이 좁은 등기소 건물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불을 질러 불에 타죽었다는 점에서 좌익의 잔혹한 죄상과 만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5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전남지역 피살자가 4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했고,(20)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서울(1,383명), 강원도(1,216명) 순이었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4,008명, 여자가 15,956명이었다.(21)

한편, 미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할 때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하면서도 학살이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북한은 미군이 압박해 들어오자 결국 이들을 학살하였다. 미군 진주 후 확인되었는데 북한측은 사람들을 새끼줄로 묶어 총살한 다음, 시체를 차곡차곡 쌓았다. 평양의 칠골리, 승호리 근방 사도리 뒷산, 기림 공동묘치터와 용산공동묘지 등에서 학살이 있었다. 함흥의 경우, 함흥 감옥과 충령탑 지하실, 정치보위부 지하실, 덕산 니켈광산, 반룡산 방공굴 등에서 수천 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46219.html

 

대전에서 민간인은 두 번 죽었다

한국전쟁 때 정부 피란처였던 대전, 남·북한군 이중의 학살 피해

h21.hani.co.kr

 

밭고랑에서 300구, 두 우물에서 171구, 모두 471구의 주검이 나왔다. 유족이 일부 찾아갔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약 500명이 대전형무소 내에서 희생됐다고 할 수 있다.

한 증언에 따르면, 우물에서 주검을 다 꺼내는 데 3일이 걸렸고, 연고자가 없는 주검은 형무소 후문에서 장작 위에 올려놓고 화장했는데 10일이 걸렸다고 한다.

구덩이를 파고, 수감자들을 그 앞에서 총살했다.

카메라가 담은 참상은 이루말할 수 없다. 주검은 여기저기 훼손당했고, 풍선처럼 부풀어 있다.

사실인데, 역사를 잘 서술하다 또 내로남불이 나옵니다.

가해자는 주로 국군, 미군, 인민군이었다. 중국인민지원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이는 ‘전쟁 상황에서 민간인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이 별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려준다.

ㅡ한국 전쟁 연구자인데 인민군이 중공군이었다는 진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 본래 중공군이던 조선족은 위에서도 말했지만, 전쟁 초반부터 후반까지 계속 참전했습니다. 북한 측 양민 학살도 전쟁을 주도했고 제일 많이 남침했던 조선족 부대가 저지른 겁니다.

점령 당시에도 위에 나온 인민재판한 사진이며 영상이며, 조선족 스스로 제작한 남한 민간인 학살 증거가 줄줄이 있지 않습니까.

https://blog.naver.com/philatelia/222835835255

 

중공군 참전 [中共軍 參戰] 2

1950년 11월 19일, 장진호 지역으로 향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   ~~~~~~~~~~~~~~~~~~~~~~~~~~~~...

blog.naver.com

이 블로그에 보면 중공군이 포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고 마오쩌둥이며 펑더화가 한 말들이 실려있고, 한국 마을 촌로들이 중공군이 제일 친절했다고 말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럼 중공군 오랑캐라는, 말이 폄하지 실제로는 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보여주는 노래가 왜 중공군을 대상으로 유독 나돌았는지 설명이 됩니까? 맨날 내로남불하다 앞뒤가 안 맞지.

https://db.history.go.kr/contemp/level.do?levelId=dh_023_1951_11_14_0010

 

자료대한민국사 < 한국 현대 사료 DB

제목 미 제8군, 중국군이 유엔군 포로를 학살했다고 주장  

db.history.go.kr

한편 UP통신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제8군의 제임스 싼리대령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중공의 포로학살 사실은 포로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정을 중공이 행하였다는 주장과 날카로운 대조가 되고 있다.

미 제8군 기록에 의하면 중공군은 253명, 미군 포로 40명 외, 터키군 포로 10명 외, 영군 포로 5명 외, 벨기에 포로 등 다수의 다른 유엔군 포로를 살육하였다.

작년 11월 이래 북한괴뢰군 또는 중공군이 근 6,000명의 남한인을 살육하였다. 중공군이 살육하였다는 중 최대수의 미군은 1951년 신정 근방에서 1950년 12월 10일 살육된 미해병대의 200명이다. 살육은 중공군의 제81사단 또 소속 제23연대 장병에 의하여 행하여진 것이다. 17명의 터키군 포로가 지난 9월 15일 양구 근방에서 지난 4월 10일 중공군에 의하여 각각 살육된 것이다. 현재까지 살육된 남한인 양민들의 총수는 판명되지 않았으나 2만 5,000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ㅡ1951년의 기록입니다. 다음 기록도 포로를 잘 대접한다는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의 주장과는 상반됩니다.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co-su-10272021075706.html

 

명나라군과 중공군의 민간인 학살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가 일본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을 때 당시 중국의 명나라가 20만 명에 달하는 군사를 조선에 보내주었다는...

www.rfa.org

 

조사과정에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건수만 해도 1,687건이 접수되었죠. 그리고 중공군 등 민간인 학살 만행은 유엔 총회의 문건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5개월 후인 1953년 12월 3일 열린 유엔 총회에서는 ‘전쟁 당시 인민군과 중공군이 유엔군 포로와 한국 민간인을 상대로 저지른 각종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습니다.

결의안에는 “유엔이 한국에서 침략을 격퇴하고 국제 평화와 지역 안보를 복원하기 위해 행동을 취하던 도중 인민군 등이 여러 차례에 걸쳐 저지른 만행들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다”며 “이들 만행은 유엔군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민간인들을 상대로도 저질러졌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조사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결의안에는수만 명에 달하는 유엔군과 한국 민간인들이 북한군과 중공군에 붙잡힌 뒤 구타, 고의적으로 계획된 굶주림, 냉혈적인 고살, 신체 절단, 고문 등으로 살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 국방부 키스 차관도 “인민군과 중공군의 만행은 유엔군 포로들과 한국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질러졌다”며 “상당수의 만행은 유엔군이 진격할 때 이뤄진 것으로 공산당에 잡혀있던 유엔군 포로들과 민간인들은 구출되기 전에 피살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습니다. 키스 차관은 미 국방부가 조사한 내용을 공개했는데 당시 중공군 피해자 2만 9,815명 중에 민간인 피해자만 해도 1만 7,354명에 달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같은 중공군의 만행은 당시 포로로 잡혔던 유엔군 용사의 증언을 통해 발간된 도서 ‘터키인이 본 6·25 전쟁’이란 책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 책에는 ‘중공군에게 잡혀 수용소에 가둬진 유엔군 포로 일부는 손이 뒤로 묶인 채 살해됐고 부상당한 포로들은 수류탄 혹은 몸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태워 죽였습니다’라고 증언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 ‘포로들을 자그마한 철장에 가두고 살을 에는 추위에 맨발로 서 있게 하거나 찬물에 몸을 담갔다 빼게 하곤 했다’고 적혀있습니다.

하긴 이런 게 펑더화식 잘 대해주는 포로 대접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와 가치관이나 개념이 같지가 않으니까요. 그래놓고 한국인들이 인식이 나빠서~ 라고 뒤집어 씌우죠.

하물며 우리가 싫어하는 나무위키에서조차 인정할 건 인정합니다.

https://namu.wiki/w/%EC%A4%91%EA%B5%AD%EC%9D%B8%EB%AF%BC%EC%A7%80%EC%9B%90%EA%B5%B0#s-10.1

 

중국인민지원군

1950년 10월 압록강 을 넘어 한반도 에 들어와 조선인민군 의 우군으로서 6.25 전쟁 에 참전한

namu.wiki

 

 

 

중국도 인정한 사실이고, 남한에서 학살 저지른 인민군도 중공군 소속 조선족 부대고, 조선족 아닌 중공군 부대도 온갖 북한에서만 온갖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걸 가지고 인정은커녕 완전 부정한 기록은 앞서 나온 한겨레 21밖에 없습니다. 역시 중국겨레. 진보 언론에는 더 있을지도 모르죠. 유시민부터가 대약진 운동 때 수천만 명은 커녕 한 명도 안 죽었다는 기상천외한 코미디언 에드가 스노우의 말을 그대로 베껴서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는, 거론할 가치도 없는 책을 출간할 정도니까요. 에드가 스노우의 저작권 살아있을 때인데 저작권은 유족에 지급했는지 의문이네요.

중국인민지원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이는 ‘전쟁 상황에서 민간인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이 별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려준다.

다시 봐도 어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중국인이 한국에 저지른 침략이며 전쟁 범죄며 각종 만행도 부정하고 미화하고 정당화하니, 지금도 중국인이 한국인들에게 가하는 증오 범죄를 혐한 정서가 아닌 혐중 정서 때문이라고 똑같은 짓을 하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피해자 두 번 죽이는 약자혐오 이차 가해에 빛나는 친중 감수성이 진보의 사상적 토대인 겁니다. 앞서 소개한, 정의를 부르짖는 진보 나르시시스트의 발언을 그대로 진보에 대입해 보죠.

이 극단적인 야만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모습.

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어떤 죽음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글쓴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걸가? 은폐를 기도하는 국가,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 이들을 방관하는 사회가 있는 한 진실을 위한 싸움 역시 계속될 수밖에 없다.

중국인 조선족이 한국 전쟁 때나 지금에나 똑같이 한국을 죽이는 극단적 야만의 잔재가 여전히 한국을 괴롭히고 있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죽어나가건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 진보의 모습.

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진보가 어떤 죽음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아직도 진보는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걸까? 은폐를 기도하는 진보 정치인, 진실을 외면하는 진보 언론인, 이들을 방관할 뿐 아니라 부추기는 혐한인들이 있는 한 진실을 위한 싸움과 평화를 위한 싸움 역시 계속될 수밖에 없다.

https://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826

 

하루빨리 6·25 전범재판 열자 - 미래한국 Weekly

전쟁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명백히 밝히고, 전범재판을 통해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여 사실을 규명할 때 6·25전쟁의 진실 바로잡을 수 있어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

www.futurekorea.co.kr

 
 

“항미원조(抗米援朝) 전쟁에서 승리한 상감령 전투 때처럼 미국에 맞서겠다." 2019년 6월, 미국의 제재로 궁지에 몰린 화웨이의 런정페이 회장이 격분해 한 말이다.

“미 제국주의자의 침략에 항거하고 북조선을 도운 정의로운 항미원조 전쟁에서 승리해 국위를 떨쳤다." 2017년 8월, 인민해방군 건군 90주년 행사에서 시진핑 주석이 한 격려사이다.

2019년 6월, 평양을 방문한 시진핑 주석은 북침설을 다시 주장하며 “북한이 침략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이 치른 용감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라고 말했다.

놀라운 역사 인식이다. 두 사람 모두 중공군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 침략자 미군과 맞서 싸운 '정의로운 전쟁'이고 '승리한 전쟁'이라는 것이다.

중국 지도자들의 항미원조 전쟁 같은 잘못된 역사 인식이 있는 한 중국이 존경받는 세계 패권국은 커녕 동북아 지역 패권을 갖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중국은 피해당사자인 한국과 참전국들에 용서를 구해야 마땅한 일이다. 아울러 일본 이상의 전쟁 피해배상 해야 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70년 전의 생생한 역사를 날조하는 것은 한국을 무시하는 일이다. 그 당시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통일하였을 것이다. 통탄스럽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ㅡ이것과는 정반대인 이재명의 역사인식.

https://www.youtube.com/watch?v=DcFXLH9DZ58

ㅡ대선에 나서며 본인과 본인 가족이 사적으로 잘못한 일이나 피해국 국민의 아픔을 배려하지 않고 상처를 줬다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걸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는 식으로 매번 넘어가는 건, 이재명만의 특성이 아닙니다.

한국 침략하고 한국인 학살한 나라들마다 감사해하며 국익인지 사익인지 더러운 평화를 지켜가겠다는 이재명. 미국에만 감사를 안 표하는 이유도 알 만합니다.

그러니 중국인만 혜택 주는 건 아니니 가짜뉴스라며 중국인만 제일 많이 혜택 받고 한국인은 세금부담 국가부채 국부유출의 삼중고만 늘어나는 현실인 거죠.

그렇지만 우리는 이재명과 달리 중국이고 대만이고 일본이고 받은 거라곤 침략과 전쟁과 학살과 인종차별밖에 없습니다. 이재명과 민주당이 중국과 대만과 일본에 고마워하는 건 너무 잘 알겠지만, 한국인인 우리가 가해국들에게 고마워할 이유 없습니다.

*오늘 내용은 미리 약속했던 내용이나 대선 당시 누락되어 지금 올립니다. 브릭스 시리즈는 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