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한 공동 대응

피해국 혐오-한국사 날조 비하 반박(2)

평범한 한국인들 2025. 4. 13. 16:06

 

환구시보는 특히 한국 정부를 향해 극우 세력과 명확한 선을 긋고 중국에 대한 허위 비난을 공개적으로 반박하라고 촉구했습니다.

MBC는 환구시보의 의견이라면 아주 신주단지 모시듯 앞에 놓고 사장 이하 앵커들은 물론 전 직원이 큰절하는 수준인데, 과연 환구시보가 MBC를 환구시보 한국 지부 삼을 만한 권위가 있나?

https://www.yna.co.kr/view/AKR20230512023000083

 

[특파원 시선] 반한감정 주도하는 환구시보 제대로 보기 | 연합뉴스

(베이징=연합뉴스) 한종구 특파원 = 한국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중국 관영매체의 비판이 도를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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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는 반한 감정을 자사의 영향력과 수익 창출로 연결시키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쏟아내는 환구시보에 있지만, 환구시보가 마치 중국 당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 보도한 기자의 책임도 적지 않다고 반성을 해본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환구시보 제대로 보기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강성파의 주장을 인지할 필요는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중국 전체의 의견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두고 혐한인들 시각을 알아보자.

이게 소위 한국인이라 주장하며 한국인들에게 차별받는다지만 실상은 자신들이 한국사를 날조하고 한국 국익을 저버리며 한국인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다문화의 추악한 민낯이다. 실시간 한국사 날조로 한국의 여론 형성에 개입해서 한국이 일본이나 중국의 도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발목 잡는 짓. 실제로 중국 일본 다문화가 군대 간 이래, 블랙요원 리스트 유출이나 이번 일처럼 정보 유출이 심해졌다.

다문화 일부의 문제일 뿐이라면 훨씬 더 많은 혐한 댓글 잔뜩 쌓여 있으니 이의 제기 시 기꺼이 더 보여 주겠다. 게다가 한국인 일부의 문제로 한국 전체가 멸망해야 한다는 싸잡기 마녀사냥을 해온 건 다문화 혐한인들이다. 인터넷 댓글일 뿐이라면 그 혐한인들이야말로 자신들이 한국에서 차별받는다며 한국 복지 예산을 한국 빈민보다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온 근거 역시 인터넷 댓글이다. 다문화 학계 방송계 언론계 인권위 발표 및 각종 연구에서 한국인의 인종차별 주장으로 인터넷 댓글이 제일 큰 근거인 게, 외국인의 혐한 인종차별 근거로는 흑인들의 증오범죄에서 이미 증명했듯 살인이나 성폭행 같은 강력범죄가 제일 많은데, 한국인의 외국인 대상 범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한국멸망소취단의 혐한 사이트들에서는 조상이 일본군 중공군이라도 되나 한국군 혐오가 직업이자 취미라서, 이번에도 중국이 아닌 국군을 욕하고 있다. 중공군 일본군은 한국 와서 그 어떤 만행을 일으켰건 나쁘다고 욕하면 안 되고, 한국군은 한 명의 잘못도 전체를 싸잡아야 한다는 게 PC주의 약자혐오에서 더 커진 피해국혐오 수준. 팔아넘긴 한국군이 제일 나쁘다며 <중국 욕할 것 없다>는 차이니즈 시그니처 가스라이팅으로 가해국의 잘못을 피해국에게 누명 씌우는 것만 봐도 PC의 본질이 가해자중심주의라는 진실이 역력히 드러난다. 약해서 당한 자가 잘못이면, 성범죄도 피해 여성의 잘못이라는 건가, 여성주의가 PC 때문에 얼마나 타락했는지 단적으로 보여 준다.

공산국가 범죄를 피해국의 잘못으로 누명 씌우는 것부터가 PC주의의 기원이 레닌의 소련이었다는 역사를 새삼 깨닫게 한다.

중국산 김치의 위생 파동이 일었을 때, 블랙 요원 리스트를 진작 중국에 팔아먹었던 조선족들은 한국산 김치 위생 동영상을 허위로 자신들이 직접 찍고 인터넷에 올린 뒤, <중국 욕 할 것 없다>는 댓글 역시 직접 달아, 중국식 여론 공작을 했다. 물론 잔류 일제 세력의 공작도 만만치 않죠. 중국에 맞서려면 일본과 손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사상누각의 헛소리인지 일본 다문화 스스로 보여준다. 그런 주장을 통해 한국이 일본에 더 굽신거려야 한다는 결론만 내릴 뿐이고, 한국 빈민 차별하며 수탈해 간 다문화 예산만 늘어난다. 가장 정확한 사실은 일본, 중국, 러시아, 동남아가 한국에서 자국 국수주의를 해대는 현재가 구한말과 똑같다는 점이다. 중국에 맞서려면 일본과 손 잡아야 한다, 일본에 맞서려면 중국과 손잡아야 한다, 이거 전부 고종이 당한 거짓말들이다. 지금까지도 속은 놈이 잘못이라고 고종과 조선을 그렇게 욕하는 자들이 그들의 조상과 똑같은 거짓말을 해대는 것이다.

그러니 중국인이고 일본인이고 조선을 그렇게 헐뜯는 것이다. 가해국 클럽 잘못을 피해국에 누명 씌우고자. 구한말 때부터 이미 다문화의 온갖 만행을 지긋지긋하게 겪었던 우리 조상들이, 독립하자마자 단일문화로 바로 돌아간 이유다.

오늘은 매년 몇십 만명씩 끌려갔으나 일제가 구했다고 주장하는 잔류 일본인 후손인지 일본 다문화인지 재한 일본인인지, 한국 국적 혐한인의 주장을 반박해 보겠다.

https://www.hankyung.com/article/2019080298051

 

거창한 '중화민족 부흥' 슬로건…그 뒤엔 '몽골리안 콤플렉스' 있다

거창한 '중화민족 부흥' 슬로건…그 뒤엔 '몽골리안 콤플렉스' 있다, 안세영의 중국 바로 읽기 (4) 중국인의 몽골리안 콤플렉스 中 역사 절반을 非한족이 통치 '실크로드 FTA' 구현한 몽골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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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중국 대륙을 완전히 지배한 경우다. 몽골의 원나라가 108년(1260~1368년), 청나라가 293년(1616~1912년)간 중원을 지배했다. 인구가 수백만 명밖에 안 되는 몽골족과 만주족이 수억 명의 한족을 400여 년간 통치한 셈이다.

둘째, 한족 왕조와 비한족 왕조가 중국을 나눠 지배한 시기다. 당나라가 망한 뒤 5대 10국 시대(907~960년)도 남중국에 있던 10개국을 빼고 화북지방에 있던 후량, 후주 등 5개 왕조가 순수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이 세운 왕조였다. 960년 한족이 송나라를 세웠지만 중국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북송시대(960~1127년), 지금의 베이징을 포함한 화북지방은 거란이 세운 요나라(907~1125년)가 차지하고 있었다. 남송(1127~1279년)도 여진이 세운 금나라(1115~1234년)에 1127년 수도 카이펑(開封)을 점령당하고 남쪽 임안(지금의 항저우)으로 쫓겨 갔다. 중국인이 한족 왕조라고 말하는 수나라(581~619년)도 선비족의 탁발부 출신인 양견(수 문제)이 세운 나라고, 당나라(618~907년)도 순수한 한족 왕조가 아니라 탁발 선비 계통의 왕조다.(양하이잉, <반중국의 역사>, 2016)

항우를 물리치고 유방이 기원전 202년에 세운 한나라가 역사상 최초의 한족 왕조다. 그런데 한 고조 유방은 오랑캐 흉노를 깔보고 친정(親征)했다가 엄청난 굴욕을 당한다. 거짓 후퇴하는 흉노의 유인전술에 걸려들어 백등산에서 선우묵돌 왕의 대군에 포위당했다가 흉노왕의 여인에게 후한 선물을 주고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다. 그 후 한나라는 공주를 흉노에 시집보내고 매년 비단, 곡물도 바쳐야 했다. 중국 역사는 이를 두고 한나라가 오랑캐 흉노에 하사(下賜)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한때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흉노제국의 눈치를 보며 조공(!)했는지도 모른다.

군사력이 약한 북송도 1004년 요나라와 ‘단연의 맹서’를 맺고,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銀) 10만 냥을 바쳤다. 남송 또한 금나라에 세공(歲貢)을 하며 왕조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1279년 몽골의 대칸인 쿠빌라이 칸에게 멸망한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29208

 

몽골의 중국 정복, 고려 때문에 가능했다

몽골제국 초대 카칸(황제)인 칭기즈칸은 재위 22년간 몽골초원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동 일부를 정복했다. 하지만, 중국 정복이 완성된 것은 칭기즈칸 사망 52년 뒤인 1279년이었다. 제5대 카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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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복, 한반도 제압 없이는 불가능했다

거란족 요나라나 여진족 금나라가 북중국만 장악하고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한 것은 고려를 제대로 굴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몽골과 청나라가 북중국뿐만 아니라 남중국까지 정복한 것은 사전에 한반도(고려·조선)를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확실한 자기편으로 만들어놓은 나라만이 중국 전역을 마음 놓고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이 뒤늦게나마 중국 전역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뒤늦게나마 고려를 자기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몽골이 이렇게 중국 정복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막판에 고려가 협조적 태도로 나왔기 때문이다. 고려는 국가를 유지하는 대신에 몽골의 중국 정복에 일조했던 것이다. 만약 고려가 몇 십 년 더 저항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막강한 몽골제국은 결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양국의 전쟁은 이런 상태로 무려 4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만약 고려와의 전쟁이 신속히 종결됐다면, 몽골은 중국 전체를 훨씬 더 빨리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서유럽으로도 진격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섯 번째 카칸이 즉위한 후에도 중국 정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려와의 전쟁이 예상 외로 장기화되면서 몽골의 군사력이 여기저기로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려를 무시한 채 중국과 총력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고려와 중국이 협공을 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중국 역사의 진리 앞에서 몇십 만 명씩 중국에 매년 끌려간다는 허위는 성립할 수조차 없다. 그랬으면 명나라는 상호불가침 조약 유지를 위해 조공이라는 명분 아래 더 많은 하사금을 내렸어야 평화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http://china.donga.com/Main/3/all/43/910919/1

 

조공국은 속국이 아니다

중국인들에게 과거 한중(韓中) 관계를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양사 대부분이 중국사지만 중국인에게 한국사는 ‘관심 없는 외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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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과 책봉의 핵심은 중국이 주변국 통치에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조공 역시 주변국의 특산품보다 훨씬 많은 회사품(回賜品)을 줘야 했기 때문에 중국은 가능한 한 조공을 줄이려 했다. 명나라는 주변국에 3년에 한 번의 조공만 허용했지만 조선은 ‘1년 3공’을 고집해 결국 관철했다. 나중에 동지사(冬至使)를 추가하기도 했다. 불평등한 외교나 무역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얘기다.

조선 역시 여진 및 유구(현 일본 오키나와)국과 조공 무역을 시행했다. 여진족은 주로 말을 조선에 바쳤고, 유구국은 남방 향신료의 주 수입원이었다. 특히 조선 초에 말은 여진족에게서 상등품 1마리당 면포 45필에 사서 중국에 500필을 받고 팔았으니 10배의 이익이 남는 장사였다. 일본 역시 중국과의 조공-책봉을 원했지만 장기간 지속되지는 못했다. 중국이 별로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데다 무역선의 난파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46485

 

머리 숙이고 '하사품 강탈'? 사대외교의 진실

성군의 대명사 세종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을 찔렀다? 평생 고기를 좋아한 세종, 오죽했으면 태종이 '반드시 고기를 올려라'는 유언까지 했을까? 단종이 비운의 왕이 된 것은 어머니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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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고려는 송나라에 조공을 할 때 미리 하사품 목록을 적어올 정도로 악착같이 이득을 취하려고 했지요. 솔직히 말해 강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함경도 관찰사가 명나라 사신의 조공요구를 거절하기도 할 정도로 중국이 강할 때는 수그리고, 중국이 약할 때는 배짱부리는 식의 사대외교로 실리를 취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일본은 나라 시대나 헤이안 시대 때 견수사나 견당사를 보내며 명백하게 중국의 신하임을 자처했고, 이런 과정에서 신라의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중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다만 섬나라의 특성상 낙후된 항해술로는 지속적인 조공 외교를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나무위키보다는 덜하지만 중국과 일본의 입김이 강한 위키피디아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A%B3%B5

 

조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공(朝貢)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과 서로 예물을 바치는 무역 행위를 말하며 유럽의 경우에는 트리뷰트(Tribute)라고 부른다. Tribute의 경우에는 로마 제국이나

ko.wikipedia.org

조공을 행하는 나라는 중국 왕조에 형식적으로 공물이라는 명목으로 무역품을 보내고 중국 왕조들은 다른 외국의 왕들에게 형식적으로만 제후국의 책봉을 주면서 받은 공물의 몇 배에서 몇십 배가 되는 공물을 하사하였다. 경제적으로 보아 조공은 하는 쪽보다 조공을 받는 쪽이 더 불리한 무역 형태였다.

일본의 경우에는 견당사(遣唐使)는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해 조공을 했고 이에 대해 중국측은 「먼 나라에서까지 해마다 조공할 의무는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렇듯 중국은 중국인 아닌 이들, 소위 오랑캐에게 침략받아 점령당한 적이 워낙 많고 중국사 내내 이민족이 세운 왕조가 태반이다보니, 이민족들에게 돈을 주고 평화를 산 것이다. 조공 무역 아니면 다른 무역을 허용치 않는 정책으로 자존심을 챙겼지만, 고구려 때부터 여러 번 패한 한국과는 매년 세 번이나 할 정도면서 일본처럼 멀리 떨어져 침략당할 일이 없는 나라와는 아예 하지 않으려 들었다. 그만큼 조공이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서는 조공을 안 바치면 중국과 무역도 못 하니, 앙심을 품고 한반도를 거쳐 중국을 침략하러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이때 중국도 조선과 함께 일본을 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대국이라면서 돈 주고 평화를 사는 일은 유럽에도 있었다.

https://news.bizwatch.co.kr/article/tax/2017/09/29/0030

 

전쟁세를 아시나요

시절 탓인지 전쟁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 같다. 세금은 모든 일상과 영향을 주고 받는데 전쟁만큼 사회의 일상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없으니, 전쟁과 세금은 매우 밀접한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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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세금의 하나는 10세기경 영국이 바이킹에게 전쟁을 면하는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징수한 데인겔트[Danegeld, 덴마크인(dane)들에게 주는 돈(geld)]이다. 지금도 당시 데인겔트 지급을 위해 사용했던 동전은 영국보다 암스테르담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당시 데인겔트의 지급을 결정한 에덜레드 2세(Æthelred II)는 일명 '준비되지 않은(the Unready)'으로 불리고 있으니, 영국민이 데인겔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후에 키플링(Rudyard Kipling)이라는 시인은 데인겔트에 관한 시를 남겼는데, 가장 유명한 구절은 "일단 데인겔트를 지급하면 다시는 덴마크인들(The Dane)을 없애지 못한다네"라는 부분이다.

프랑스에서도 뚱보왕 샤를이 파리공방전을 벌인 바이킹들에게 257kg의 은을 주었다. 애초에 그 공방전이 파리 점령이라기보다는 프랑스에 공물을 받아내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샤를은 바이킹 흐롤프르를 신하로 삼아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맺고 회유했다. 로베르라는 이름으로 샤를의 신하가 된 바이킹들은 노르만족이었기에 이들이 자리잡은 프랑스 지역은 노르망디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로베르는 죽는 날까지 툭하면 프랑스를 약탈했으며, 노르만 귀족들은 이후 영국을 침략해서 정복했다. 영국의 노르만 왕조는 봉신으로서 영토를 내린 왕에게 복종해야 하는 동시에 동아시아의 조공 외교처럼 상호불가침이 없던 봉건제도 아래서, 군주국인 프랑스를 침략해서 백년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건 영국이건 돈을 중국처럼 계속 지불하지 않았기에, 그들 나라의 부분적 혹은 전체 점령, 역사 내내 계속 되는 침략전을 막지 못한 것이다. 결국 조공 외교는 돈으로 산 평화였을 뿐으로, 이는 한국의 중국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할 역사가 아니다. 조선을 속국이라고 하기 이전부터 중국부터가 400년이나 이민족에 점령당한 노예국이었으며, 원나라나 청나라처럼 노예 신세로까지는 떨어지지 않았어도 이민족 왕조에게 계속 지배당했었고, 피점령 국민으로서 차별과 억압을 겪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조선을 노비국이라 비웃는 잔류 일제 세력의 주장을 그대로 대입해, 조선과 달리 침략도 안 받았다고 자랑하는 일본 자유민들이 실제로는 전 세계 노예였다는 역사의 진실을 알아보겠다.

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57694

 

하시모토 망언으로 본 일본 성매매 역사

[일요신문] 일본의 유흥·향락산업은 규모가 우리 돈으로 60조 원에 달할 만큼 번성했다.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실제로 일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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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교토와 오사카에 유곽을 만든 것이 처음이다. 매춘업자를 한군데에 모아 거기에서만 영업을 허가한다는 일본의 공창제도는 세계사적으로도 빠른 편이다.

공창제도는 에도시대에 더욱 확대되어 18세기에는 전국적으로 25개소로 늘어났다. 매춘부는 인신매매로 공급됐으며 유곽 안에서는 오직 돈만이 모든 것을 좌우했다.

1872년 일본의 유곽 문화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요코하마항에 입항했던 페루 국적의 마리아루스호가 그 계기가 됐다. 당시 마리아루스호에는 중국인 노예 231명이 타고 있었는데 한 노동자가 가혹한 노동을 피해 바다 속으로 도망친다. 그가 영국군함 측에 구조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영국은 이 배가 ‘노예 운반선’이라고 판단해 일본 정부에 구조를 요청한다. 일본 정부는 즉시 마리아루스호 선장을 소추했는데 문제가 된 것은 재판이었다. 선장 측의 변호인은 “일본이 노예계약을 무효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당치 않는 일이다. 일본에서는 더 심한 노예계약이 유효하게 인정받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유녀(游女)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매춘이라는 ‘인신매매’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는 일본이 노예 매매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일본 정부는 반박하지 못하고, 결국 그 해 10월 인신매매를 금지하고 창기 해방령을 포고했다. <주간포스트>는 이를 두고 “일본이 성노예 대국으로 세계에 각인된 사건이었다”고 보도했다.

여기서 보면 중국에서 중국인 노예들이 팔려가는 과정에서, 일본인 노예들의 존재도 밝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이전에도 왜구들에 납치당한 중국인들이 노예로 팔려나갔지만 1807년에는 흑인 노예가 금지되면서 왜구 납치가 아닌 조직적 노예 무역이 본격화됐다. 반면 잔류 일제 세력과 중국 식민주의 세력이 썩어빠져 망할 만한 나라였다고 욕하는 조선의 백성은 마리아 루스 호에 한 명도 타고 있지 않았다. 조선인도 임진왜란 때나 병자호란 때 같은 전란이나 왜구 습격에 당했으나, 평화 시에도 중국인이나 일본인처럼 자국민 손에 대규모로 노예로 팔려나가는 일은 없었다. 청나라 정부는 마리아 루스 호 사건 이래 자국 내 노예무역을 금지하려 하긴 했으나 이후 쿨리들이 송금하는 돈이 늘어나자 모른 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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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게 노예 무역과 잔인한 폭력을 교사(敎唆)하다 … 반인류 범죄의 뿌리를 찾아서 | 천부교 /

일본에서 행해졌던 가톨릭의 행태들은 일본인들의 큰 반감을 일으켰고, 쇼군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가톨릭 금지령까지 선포되었습니다. 또한 가톨릭 예수교의 승인 아래 무자비하게 행해졌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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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국가가 일본에서 노예무역을 시작하긴 했지만, 제목처럼 일본인들의 큰 반감을 샀다기에는 오히려 일본인들이 조선처럼 노비가 아니라 자유민이라고 주장하는 자국민 노예 무역에 적극 나섰다는 증거가 일본 역사가들 손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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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찾아낸 일본의 인신매매와 성노예의 역사는 8세기 나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녀라 부르는 매춘부가 이 때 등장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폭력이나 기망, 유혹, 인신매매의 방법으로 어린 소녀일 때 끌려와 성노예 생활을 했다. 이런 일이 이후 수세기 동안 이어지고 전국의 도시와 교역루트를 따라 이동·확산하면서,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인신매매는 더욱 성행했다.

이렇듯 일본 매춘부는 본래 강제연행이 기본이고, 조선의 유곽도 일제가 만든 건데, 같은 경로로 매춘부가 된 여자들이 위안부에 일부 포함돼 있었다고 해서, 혹은 강제 연행 피해자들도 일제가 준 월급이 인플레로 휴지 조각 되기 전까지 집에 보냈다고 해서, 강제연행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여성혐오고, 이걸 한국 국적 여성이 두둔한다는 것 자체가 다문화가 얼마나 제국주의 문화인지 여실히 드러낼 뿐이다.

저자는 14세기 왜구가 벌인 조선인과 중국인 납치와 인신매매, 대항해시대 일본이 동남아시아 전역을 상대로 벌인 노예매매의 역사도 살핀다. 세계적인 노예무역 성행과 함께 14,15세기 왜구는 인간사냥과 인신매매에 맹위를 떨쳤는데, 주로 한반도와 중국 산둥반도 등지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들을 납치, 일본 각지나 류큐 왕국 등에 노예로 팔아넘겼다.

16세기 후반에는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의 선교사들과 상단들이 일본을 왕래하면서 일본의 서부 지방 영주들은 전쟁포로와 옆동네 주민, 주변국에서 납치한 사람들을 노예로 팔고 화약과 총을 구입했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유럽을 비롯, 세계각지로 팔려나갔다. 1578년 리스본의 대규모 노예 밀집 지역에선 중국인과 일본인 노예도 상당했다. 이들의 상당수는 일본 소녀들이었다. 1582년 가톨릭 다이묘들이 로마 교황 접견을 목적으로 신학교에 다니던 4명의 13~14세 소년들을 유럽에 파견한 덴쇼 소년사절단의 보고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일본 여성이 많이 눈에 띈다. 유럽 각지에서 50만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나온 혐한인의 댓글과 달리 몇 십만명씩 끌려간 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 여성이었다. 자국의 수치를 한국에 뒤집어 씌우는 행태 그대로다.

뒤 이어 에도시대 도쿠가와 막부는 1617년 도시의 외곽에 유곽을 설정했는데, 일본 최대의 요시와라 유곽은 한 때 수천 명의 유녀가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유녀들은 죽을 때까지 유곽을 떠나지 못했는데, 평균 수명은 23세였다.

일본의 지성 후쿠자와 유키지는 “매춘부의 해외 수출은 적극 장려해야 하며, 막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20년경이 되면 가라유키상은 국가의 수치로 바뀌어 퇴출되고, 국가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잔류 일제 세력의 이토 히로부미 숭배와 달리 전 세계 포주로 근대화 자금을 쓸어담던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암살당하지 않았으면, 가라유키상은 훨씬 오래 존재했을 것이다. 일본 여성들과 그들의 남성들은 안중근에게 감사해야 한다.

https://www.khan.co.kr/article/201910132046005

 

[김시덕의 명저로 읽는 일본의 쟁점](2)나가사키에서 팔려나간 일본·조선인들…그리고 끝나지

오늘 소개할 책은 포르투갈·에스파냐 사람들이 온 지구의 바다를 석권하던 시기에 전 세계로 팔려나간 일본인·중국인·조선인 노예들의 실상을 밝힌 오카 미호코와 루시오 데 소자의 공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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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법무성 내부자료에 따르면 2015~2017년 외국인 기능실습생 69명이 자살·동사(凍死) 등으로 사망했다고 하며 2009~2018년 한국에서 자살한 네팔인 노동자만 43명에 이른다고 한다(과연 현대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유럽인의 노예 무역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항일 신문인 척하면서 꼭 혐한을 끼워넣는 게 한겨레 시그니처인데, 한겨레가 근거로 드는 네팔에서는 수십 년간 수많은 네팔 출신 부탄 난민들이 차별받고 억압당하며 그들의 자살율은 아무도 기록하지도 않는다. 네팔의 난민 차별에 이어 미얀마는 로힝야 족을 차별하며 베트남은 소수민족을 차별하고 태국은 미얀마 난민을 차별하고, 동남아 모두 이주민에게 한국 같은 부동산 소유, 참정권, 인도적 체류권 등을 허용하긴커녕 무상치료와 무상교육, 각종 다문화 지원도 하지 않으며, 자국에서 태어나 오래 산 외국인들조차 차별하고 있다. 그러니 한겨레식 인도주의에 따르면 이주 노동자 전원이 한국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세금을 이 위선자들이 아닌 우리의 빈민에 써야 하며, 그들이야말로 한국을 비판하기 전에 자국의 이주민 제도나 바꾸고 고쳐야 한다.

한겨레가 본래부터 중국겨레였던 건 아니다. 하지만 통일을 망친 중국의 한국 침략을 항미원조보다 먼저 왜곡하고, 장쉐량과 대만정규군이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까지 수도 없이 저질렀던 만주 조선인 마을 학살 역사를 은폐해서 한국의 피해자가 되려는 화교들이, 참정권도 외국인 전형도 세금 특혜도 각종 다문화 특혜도 없는 재일교포와 자신들을 동일시하여 피해국을 가해국으로,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드는 수법의 공범이 된 이래 그들 스스로 <한국이나 일본이나 똑같다>에서 시작해 <중국 욕 할 것 없다>로 이어지는 중국 식민주의 혐한 가스라이팅 언론이 되었다. 그러니까 자국민과 납치당한 외국인들을 노예로 판 가해국 일본과 피해국 한국을 같이 묶어서 취급하는 미개한 야만도 태연히 범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일본과 유럽의 노예 무역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한겨레식 정의에 따르면, 흑인들도 상대 부족민을 잡아 백인들에게 파는 등 노예 무역에 관계했기 때문에 흑인도 백인들의 노예 무역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의병전쟁이고 독립전쟁이고 싹 다 부정하며 일본과 전쟁 안 했으니 일본의 침략을 부정하는 한국사 날조 혐한 주장을 하나 받아들이면, 유럽 열강과 나치와 소련과 전쟁 안 했지만 식민지로 전락한 유럽 태반과 아시아 아프리카 각국의 역사도 부정하게 되어, 전 세계 모독과 혐오도 같이 하게 되는 한동훈 도미노가 또 생기는 것이다. 한겨레야말로 한동훈과 똑같은 짓을 해대니 국힘당을 비판할 자격도 없다.

또한 한겨레의 주장은 앞서 흑인의 한국인 대상 증오범죄 나열에서 소개한 샘 오취리 사태 인터뷰에서 샘 오취리가 눈 찢기했다고 인종차별 문제를 제기할 자격이 없다는 건 틀렸다고 주장한 흑인 원어민 교사의 주장에도 위배된다.

한겨레 기자들을 포함해 이주민 인권운동가들, 원어민 교사들과 흑인들의 주장을 분석하면, 결국 그들 모두가 PC주의에 함몰되면 소련의 숙청 원리로 생겨난 PC주의 특유의 내적 모순 때문에 자가당착과 이중성이 자동 발현된다는 우리 주장의 산 증인들이 된다. 애초에 이주 노동자에게 살해당한 한국 여중생이며 대학생, 그외 마약을 포함한 각종 이주민 범죄 피해 한국인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짓밟을 정도로 한국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가짜 인도주의자들의 추악한 민낯이다.

일본인들은 늘 한국을 자국민을 노예로 삼은 노비국이라고 혐한하는데, 정작 일본인은 8세기부터 자유민으로 태어나도 부모의 손에 유곽에 팔려 성노예가 됐고, 중세부터 같은 동국민 손에 수십만 명씩 노예로 팔려나갔다. 진실이 이런데 노예무역국 일본 이전에 조선인이 수십만 명씩 끌려갔다니, 자국 역사의 치욕을 한국사에 뒤집어 씌우는 누명 가스라이팅이다. 나라야마 부시코 황금종려상 수상작에도 나온 일본 우바스테야마 풍습을 고려장이라는 허위에 숨겼듯 말이다.

우리의 증거는 늘 차고 넘치니, 모자라면 언제든 이의 제기하기 바란다.

또한 우리는 늘 우리가 오랫동안 당해 온 혐한 인종차별에 반박할 뿐이지, 우리가 먼저 비판한 대상은 하나도 없다. 외국 사례도 진보 글로벌리스트들이 외국 따라 고치고 바꿔야 한다는 식으로 가스라이팅하기 때문에 전 세계를 주름잡던 글로벌리스트들의 사상이 얼마나 위험하며 얼마나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 파헤쳤을 뿐이다. 현재 한국이 늘 중국과 일본을 욕하고 한국인만 선하게 묘사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데, 우리는 한국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으며, 애초에 중국과 일본과 화교가 정치인부터 민간인까지 광범위하게 오랫동안 혐한을 해왔기 때문에, 그들의 혐한에 반론했을 뿐이다. 그런 비난 자체가 중국과 일본의 혐한을 피해자인 한국에 떠넘기는 누명이며, 가해자가 피해자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 된다는 우리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될 뿐이다.

또한 우리처럼 혐한 댓글을 발견하면 자존감 도둑질 당하지 말고 안부게시판에 비밀글로 제보하면, 우리가 대신 반박해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