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무위키에 따르면 흔적도 없이 소멸당해 버렸으며 과거사 문제도 언급하지 않고 조용히 산다는 잔류 일제 세력이 인터넷서 왕성하게 퍼뜨리는 혐한 한국사 날조 반박하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본디 자신들이야말로 구한말부터 일본은 선이요, 한국은 악이라는 흑백 논리 퍼뜨려 왔으면서 우리가 반론하자마자, 댓글로 우리에게 흑백 논리 누명 뒤집어 씌우는데, 반박하겠답시고 대는 근거마다 전부 허위뿐이고 오히려 그 근거라는 사이트들이야말로 그 자신이 한국에게 누명 씌운 흑백 논리를 엄청난 혐한으로 퍼뜨리는 곳이었다. 혐한은 소수 극우라고 주장하더니,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희생을 전부 부정하고 일제를 구원자로 칭송하는 본인을 포함해 얼마나 많은 일본인이 혐한인지 우리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잔뜩 제공해 주었다.
이 싸잡기 마녀사냥 원조에 인종차별 가해자들이 한국에서 사회적 약자라며 외국인 정착금에 다문화 지원금에, 세금 및 대입 혜택까지 받고 있는지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다.
혐한 커뮤니티(갤러리) - 혐한 관련된 글과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굳이 가서 조회수 올려줄 필요는 없이, 우리가 내용 요약해서 반박해 주겠다.
일본과 중국이 얼마나 전 국민 노예국 혹은 노예 수출국이었는지는 이미 지난 포스팅에서 증명했고, 증거가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더 많은 증거를 제공할 테니, 언제든 이의 제기하기 바란다.
이 혐한인들의 전략은 자국보다 한국이 더 썩어빠진 나라였음을 증명해서, 자국의 침략이 구원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 든다. 일제가 한국을 발전시켰다는 재한 일본인의 주장이나 재한 중국인의 항미원조나 본질은 똑같다. 중국인은 항일 투쟁 때도 같이 싸운 독립군을 체포하거나 일제에 매수돼 독립투사를 암살하는 식이어서, 한국이 아니라 사실상 일본의 동맹이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중국을 견제하려면 일본과 손잡아야 한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도 틀렸고, 이 두 세력의 주장이 혐한에서 완벽히 일치하는 현재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두 가해 세력이 사회적 약자라며 특권을 독점하고 한국의 정당방어 여론 형성을 조선의 근대화처럼 방해하기 때문에 PC주의부터 쳐부숴야 하는 것이다.
이 이주민 특권 세력들이 선호하는 증인은 구한말 프랑스 외교관인 빅터 콜린 드 플랑시다.
플랑시는 조선의 노비들을 아이 낳게 하고 아이가 딸이면 팔아서 돈을 버는 일을 비판했다. 물론 인권유린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망할 만한 나라, 망해도 싼 나라여서, 일제가 구해줬다는 일본 다문화들의 주장은 틀렸다. 지난 포스팅에서 증명했듯 8세기부터 자유민도 딸을 유곽에 팔아 돈을 벌고, 중세부터는 정부가 본격적으로 성매매와 인신매매, 노예 수출을 주도해서 20세기에만 50만 가라유키상 수출로 근대화한 일본의 치욕을 감추고자 한국에 뒤집어 씌우는 잔류 일제 세력 수법이다. 일일이 증거를 댄 포스팅도 안 읽고 이의를 제기해서 매번 설명을 되풀이하는 일을 양해 바란다.
그렇다면 조선의 노비제를 비판한 프랑스는 어땠는가? 이 플랑시의 아버지가 역사가였으니 그의 저서를 보자.
야만의 시대 | 마르셀 - 교보문고
야만의 시대 | 야만의 시대를 산 프랑스 농노의 회고 내부자의 시선으로 기록한 자크리 농민전쟁이 책은 중세 프랑스 자크리 농민전쟁에 가담한 농노가 자신의 인생사와 당대의 사회상을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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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의 역사는 대부분 권력과 지식을 가진 지배층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것임을 고려할 때,《야만의 시대》는 피지배층의 관점에서 개인의 경험과 당대의 사회상을 생생하게 담았다는 점에서 매우 희귀한 책이다. 또한 서양 중세 말기의 실상, 자크리 농민전쟁의 배경과 전말을 보여 주는 귀중한 사료이자 당시 민중의 삶과 문화를 정밀하게 묘사한 탁월한 기록문학이다.
작품은 자크리 농민 전쟁의 주모자 중 한 명인 마르셀이라는 농노의 회고록을 외교관 플랑시의 부친인 역사가 자크 콜랭 드 플랑시가 발견해 현대어로 번역한 것이다. 페터 바이스의 소설처럼 강추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프랑스 농노가 직접 그려낸 실상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데 실로 충격적이다.
특히 자크리 농민 전쟁은 유럽 중세 농노의 삶이 나아졌다고 하는 14세기에 일어난 것이라 더욱 의미 있다. 흑사병 때문에 일손이 모자라 임금이 올라가고 대우가 높아졌다는 주장이 나무위키는 물론 웹소설 같은 곳에서 흔히 발견되지만, 실제로 흑사병 이후 7 년 뒤에 일어난 자크리 농민 전쟁은, 억압을 참다 못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으나 실패한 혁명이었다. 그 이후 영국에서 일어난 와트 타일러의 난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원전》은 2,500년의 인류사를 총망라한 현장 기록, 역사의 크고 작은 사건을 직접 목격한 목격자들의 기록이다. BC 430년 아테네의 역병에 대한 투키디데스의 기록을 시작으로, 타키투스가 기록한 불타는 로마에 대한 기록,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처형 장면, 타이태닉호 침몰 장면, 아우슈비츠 가스실 현장 등 우리가 역사책 속에서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을 목격자들의 생생한 기록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해준다. 2,500년이라는 장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생한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 있던’ 현장의 기록 181개를 9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담은 것이다.
이 책에서 당대의 기록으로 생생하게 그려낸 페스트와 와트 타일러의 난을 일으킨 직접 원인은 인두세였는데, 1451년 노동법령으로 페스트로 인한 임금 상승을 막은 것도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페스트로 인건비가 상승한 건 사실이나 왕이 임금 상승을 금지하는 법을 선포하고, 그 법을 어긴 사람이면 귀족이건 성직자건 전부 무거운 벌금을 매겼다. 임금을 더 많이 받은 일꾼들은 감옥에 가두어 벌금을 물렸고, 도시의 상인 부르주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왕이 엄금했고, 그들의 늘어난 수입도 벌금으로 도로 빼앗았고, 이후에는 인두세까지 정했다.
여러 곳의 반란들이 실패해도 농노가 폐지되며 사회적 지위는 점차 올랐고 오로지 조선만 노예제였다는 식으로 혐한인들은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20세기까지도 나라가 부강해져도 백성은 점점 가난해지는 식으로, 문서에 나온 농노제 폐지가 실제로 이뤄지긴커녕 오히려 더 교묘해져 산업 혁명의 아동 노예 정도가 아닌 아동 살인까지 이어졌다고 볼 근거가 확실하다. 지금부터 나올 모든 사실을 두고도 그 피해자들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이었다고 말하는 이들의 인권 의식 수준은, 사도광산이나 군함도의 강제징용피해자들을 잘 대해줬다고 주장하는 일본인들 수준과 다를 바 없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는, 지금도 자자손손 혐한의 흔적을 소위 문화 컨텐츠까지 남기는 판이다.
다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자면 초반부터 여성에게 쟁기를 씌워 밭을 몰게 하는 등 여성을 가축 취급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주가 가축 사료비가 아깝다고 가축을 팔아버리고 농노들을 가축처럼 혹사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럽 역사가들이 실상은 없다고 주장하는 초야권에 대한 이야기도 상세했다. 나무위키는 초야권이 없으며, 유럽에서 영주들이 폭정을 저지르면 자리를 유지하기 힘들었다고 주장했는데, 역시 아무 증거 없이 경상도에서 광복 후 일본인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날조 사이트답다. 역시 이미 설명한 내용이지만, 지난 번 일본인의 이의 제기로 더 많은 증거를 풀겠다.
독수리작전(禿수리作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임시정부는 일본이 항복하자 국내정진군을 8월 16일 출발시켜 18일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국내정진군은 일본군의 저지를 받아 8월 19일 중국으로 귀환했다.
무조건 항복한 주제에 미군과 광복군의 광복군 작전도 일본군이 막았는데, 경상도건 어디건 조선인이 무슨 수로 일본인을 공격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일본군이 혼란을 틈타 일본인 부자들을 강탈하고 조선인들이나 소련군에 뒤집어 씌웠다고도 볼 수 있다.
http://www.atlasnews.co.kr/news/curationView.html?idxno=3203
해방후~미군정기 혼란속 하이퍼인플레이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조선은 해방을 맞이 했다. 준비되지 못한 해방은 혼란의 극치였다. 정부도 없었고, 통화를 발행할 주체도 애매했다. 무기력해진 조선총독부는 미군이 들어오기
www.atlasnews.co.kr
무기력해진 조선총독부는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치안을 맡았다. 그 치안은 본국으로 돌아갈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서둘러 귀국을 준비하면서 은행에 저축한 돈을 인출했고, 조선은행은 조선은행권을 대량으로 발행했다. 철수 직전의 조선은행 일본인 간부들은 100원짜리 지폐인쇄 원판을 빼돌렸다. 그들은 그 원판으로 근택인쇄소라는 곳에서 지폐를 몰래 인쇄해 예금을 인출하는 인본인들에게 나눠줬다. 며칠 사이에 100원권이 두배로 발행되었다.
해방직후 20여일간 조선총독부 손아귀에 있는 조선은행은 미친 듯이 돈을 찍어 냈다. 지폐 용지가 모자라 모조지에다가 지폐를 찍어냈다.
이때 일본인들은 예금 43억원 가운데 28억원이 인출되었다. 그들은 가마니에 돈을 싸놓고 귀국을 기다렸다. 주2)
나무위키의 잔류 일제 세력은 바로 조상들의 위폐 사기죄와 그로 인한 초 인플레 유발을 감추기 위해 731 부대 민간인 가담자의 딸이라는 의혹을 받는 작가조차 아무 증거를 대지 못한 요코 이야기니, 경상도에서 일본인들이 공격당했다는 둥 역시 아무 증거 없는 한국사 날조를 하고 있다. 요코 이야기가 조선총독부 위폐 사기죄보다 더 유명한 것만 봐도 얼마나 성공적인 가스라이팅인가.
재한 일본인 처들부터가 한국 위안부 피해자들과 달리 1970년대부터 전용 보호 시설에 살며 각종 지원을 받아왔고, 늘 일본인들의 범죄라면 위폐건 위안부 강제연행이건 입 다물면서 한국에서 받았다는 차별은 외신에 적극 알려 왔다. 외신에 대고 혐한 인터뷰하는 게 나무위키가 주장하는 흔적도 없는 소멸의 증거인가?
가짜 역사로 진짜 역사를 덮는 동시에 그 날조범인 자신들은 그렇게 조선인들의 공격으로 흔적도 없이 소멸당했다는 허위 주장으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 가해자가 피해자 위치를 빼앗는 인권유린도 서슴치 않는다. 나무위키는 또한 재한 일본인들은 과거사 문제에 신중히 침묵한다는 식의 허위도 같이 퍼뜨리며 진짜 <흔적>을 지우고 있다.
계속 논의를 이어나가자면, 마르셀이 증명한 초야권은 실로 광범위해서 귀족끼리도 했다. 대영주가 봉신의 아내를 요구한 결과, 마르셀을 소유한 영주의 맏아들은 대영주의 피를 이어받았다. 아내와 맏아들은 대영주와 관련된 자신들이 남편이나 아버지보다 더 지위가 높다고 생각해서 대영주를 등에 업고 영주를 무시했고, 본래도 포악하던 영주는 더욱 폭정을 범하게 된 과정이며, 다른 초야권 이야기도 상세히 나와있다.
또한 각 지역마다 통행세가 높아서 사실상 이주의 자유가 제한만 되는 정도가 아니라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자유민이라도 영주가 사로잡아 농노로 삼을 수 있었다. 심지어 마르셀 외삼촌의 주인이던 기사는 삼십 년 전 있던 성전 기사단 해체 때,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쳤던 자로서 마르셀의 집에 그 외삼촌인 노예 한 명만 데리고 와서 하룻밤 묵었는데, 영주의 심기를 거슬려서 농노로 삼겠다는 협박에 저항한 결과 끔찍하게 살해되었다.
통행세 때문에 자유민도 거주 이전의 자유가 사실 없는 판인데, 영지 내에서조차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었다. 영지 내 다리라도 있으면, 다리를 건널 때마다 통행세를 내야 했다. 마르셀이 목격한 사건에 따르면, 한 여자가 아이를 다리 이편의 집에 혼자 두고 볼일을 보러 다리를 건너며 통행세를 냈는데, 건너고 돌아서자마자 다리 건너편 집에 불이 난 것을 보았다. 여자는 기겁해서 당장 집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다리를 지키던 병사가 가로막고 통행세를 요구했다.
통행세가 이럴 정돈데, 일본보다는 낫지만 유럽의 세금도 엄청났다.
풍속의 역사 1(풍속과 사회)(개역판) | 에두아르트 푹스 - 교보문고
풍속의 역사 1(풍속과 사회)(개역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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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책은 민중의 눈과 글을 통하여, 각 시대의 풍속과 그것에 대응하는 상하부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역사발전의 주체인 민중이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유럽 최초의 과학적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새로운 자료, 파천황적인 테마, 위대한 모럴리스트인 저자의 정신과 사상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 책은 인류의 지적 자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자 자신은 이 [풍속의 역사]에 의하여 그의 문명사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여기에 등장하는 인용문과 그림 다수가 민중 드자신의 것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그 어떤 역사서보다도 참으로 "살아 있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흥미 위주로 이 책을 우리 중 최초로 읽었던 사람은 충격 받았다. 유럽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풍속을 기대했는데, 정작 첫권부터 읽은 것은 유럽의 끔찍한 착취 현실이었던 것이다. 푹스는 5프로에게는 낙원이지만 95프로는 굶어죽는 사회라고 고발하고 있다.
1789년 프랑스에는 44명의 징세청부인이 있었는데, 이 징세청부인이란 국왕에게 국왕이 필요한 돈을 주는 대가로, 프랑스 백성에게 마음대로 세금을 긁어 모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면 국왕은 국세청 같은 조직 운영비를 절약하면서 돈을 빨리 받기 때문이다. 그 결과 프랑스 백성은 실제 정부에 들어가는 돈의 2배를 내야했다. 정상적으로라면 그 반만 내면 될 것을 말이다.
징세청부인이 없는 나라도 사정은 최악이어서, 프로이센에서는 일단 군대를 위한 세금을 33. 3프로 뗀 뒤, 그 남은 수입에서 절반을 다른 세금으로 떼갔다.
매관매직도 전통이어서 왕은 사실상 관직을 경매에 붙였고, 제일 많은 돈을 내고 산 관리는 그 돈을 낸 만큼 국민들에게서 뜯어냈다. 만일 요구 금액이 너무 높아서 아무도 입찰하지 않으면 무조건 부자에게 강제로 수여됐고, 부자가 그 영예를 거절하면 변경 요새로 보내지거나, 프랑스서는 아예 바스티유에 갇혔다.
그래서 관직이 무한대로 늘어났다. 돼지 검사관, 가발감독관, 버터 신선도 검사관, 버터 시식관, 석재 검사관, 건초 계산관, 목재 쌓기 감독관, 눈 판매관, 포도주 검사관 등 종류가 끝도 없었고, 포도주 검사관만 900명이 있었다.
이러니 농민은 자유민이라 해도 자기 땅에서 직접 기른 포도로 담근 포도주조차 관리에게 검사를 받고 수수료를 내지 않으면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직접 만든 버터도 돈 내야 먹었고, 석재나 목재의 검사를 받지 않으면 집도 못 짓고, 건초나 돼지 수수료를 내지 않으면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치지도 못했다. 사람이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결혼할 때도 세금을 내야 했다. 집에 창문만 내도, 벽지만 발라도, 난로만 설치해도 세금을 내야 했다. 조선에선 노비도 안 당하던 짓인데 저런 짓 당하는 이들이 자유민으로 보이나?
그 모든 세금을 다 바쳐도, 자고새나 꿩 같은 인기 사냥감의 번식기에는 농사일을 할 수 없어서 농민이 농사를 망쳐도 배상조차 없었다. 조선에서 그런 일이 상상이나 가는가.
게다가 기근이 들면, 조선처럼 소 빙하 기후 때문에 큰 기근이 들어 막대한 피해를 입어도 구휼미를 내리거나 하는 대신 왕이 직점 매점매석에 나섰다. 루이 14세는 전담 회계과장까지 두고,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곡물매점조합이 취하는 폭리에서 개평을 떼어 막대한 돈을 벌었다.
전하의 늙은 첩이 농사가 흉년 때마다 닥치는 대로 곡물을 매점해 진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국민은 굶주림으로 마구 죽어갔다고, 루이 14세의 제수인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맹트농 부인을 헐뜯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농사가 흉년인 것도 조선처럼 천재지변이라기보다 저렇게 인재인 경우가 많았고, 그럴수록 왕은 더 돈을 벌었던 것이다.
심지어 조선은 일제강점기 때나 겪은 식기 공출을 프랑스에서는 17세기에 왕실의 막대한 낭비 때문에 생긴 적자를 메꾸고자 실행됐다.
그리고 약소국인 독일의 공국들은 아예 인신매매를 했다. 뷔르템베르크니,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작들은 외국에 용병팔이를 해서 돈을 벌었다. 18세기 미국의 독립 전쟁에 용병으로 간 독일 군인들은 부상을 당하면 미국에 버려져 귀국하지 못했다. 부상자 보상금도 자기가 챙기기 위해서였다. 특히 뷔르템베르크 공작은 혼외자 아들들을 장교로 더 비싼 값에 네덜란드의 아프리카 식민지로 팔아넘겼다. 뷔르템베르크 출신인 실러도 용병 장교로 팔려갈 운명을 피해 고향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는 공작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반귀족적인 작품을 썼다.
그리고 이 모든 돈을 어떻게 썼는가 하면, 뷔르템베르크의 모든 인구를 하루 동안 먹여살릴 돈을 단 하루의 불꽃놀이를 위해 탕진했다. 사냥을 하며 짐승을 절벽 아래 연못에 떨어뜨려 죽이겠다고, 혹한에 사람의 손으로 연못을 파게 하고 먼 곳에서 끌어들인 물이 얼지 않도록 40대의 난로를 설치했다.
오늘날 베르사이유를 비롯 유럽 궁정을 돌아보면, 그 모든 착취가 고스란히 들어간 사치를 볼 수 있다. 세금은 훨씬 적고, 전쟁은 더 적고, 매점매석 매관매직은 양반이 앞장서서 비판하고 외국처럼 관습으로 굳어버리지도 않고, 훨씬 덜한 사치를 부려도 폭군이라며 왕이 쫓겨나는 조선 왕조는 망할 만한 나라였다고 욕하는 이들이 해외 여행 가서, 진짜 망할 만한 나라들의 현장에서 너무 멋지다고, 한국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이라고 정신줄 놓고 찬양해댄다. 그게 한국 멸망소취단의 공감능력과 지능 수준인 것이다. 여성과 아동 착취로 쌓은 부의 상징을 좋아하는 거야말로 여성혐오고 아동혐오다. 한국 여성계엔 한국 여성만 없는 게 아니라 여성도 없나보다. 전부 논 바이너리 젠더 플루이드라면 할 말 없고 말이다.
18세기 파리 인구 6분의 1이 거지고, 전체 거지 수는 25 만명이었다. 이게 나무위키에서 주장하는 영주가 폭정을 하면 다스리기 어려우니까 대우가 나쁘지 않았다는 유럽 농민들의 삶이었다. 나무위키 인권 의식 수준이 사도광산이며 군함도 기념관에서 강제징용피해자들을 잘 대해줬다고 우기는 현지 일본인들 수준인데, 그러고도 참 광복 이후 잔류 일본인 세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리가 있나. 그 자신들부터가 나무위키며 디씨며 네이버 댓글란이며 그외 각종 혐한 사이트에 아주 거대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아니라면 다문화 혹은 일본 이민자들이겠다. 스스로 대일본 제국 운운하며 한국인을 조센징이라 부르는 이들인데, 왜 우리가 그들을 친일파나 매국노로 불러야 하나. 실제로 재한 일본인 수는 점점 늘어나며, 그들은 나무위키 주장과 달리 한국사 날조에 갈수록 적극 나서고 있다.
계속 논의를 이어가자면, 19세기에는 절대주의도 몰락하고, 프랑스 대혁명도 있었고, 노예도 없고 하니까 나아졌을까?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이 사실상 노예로 몰락했다.
빈민수용소에서 공장으로 팔려간 7세부터 13-14세 아이들이 쇠사슬에 묶이고 채찍으로 뼈까지 드러날 정도로 맞아가며 15시간을 일했다. 18세기에 랭카셔에서는 성인 남자 노동자가 26000명, 여자 노동자가 31000명인데, 아이들은 대부분이 10세 이하로 35000명으로, 오히려 아이 노동자가 더 많았다. 더 싸서 더 돈이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갈수록 연령이 점점 내려간다. 평균 연령 6세의 아이 3000명이 일했다는 기록 보고 기거바면, 그 다음에는 2살 짜리 유아의 노동이 나오는 식이다. 14세에서 20세에 이르는 소녀들도 추운 공장에서 19-22시간의 중노동에 혹사당하다 요절했다.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에도 삶이 나아지지 않은 하층민들이 다시 봉기를 일으켰고 또 실패했다. 바로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다.
https://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9/10/2019091000010.html
[숨어 있는 세계사] 대혁명 43년 후 이틀간의 봉기, '레미제라블' 배경이죠
[숨어 있는 세계사] 대혁명 43년 후 이틀간의 봉기, '레미제라블' 배경이죠
newsteacher.chosun.com
19세기에는 소위 굴뚝소년들이 있었는데, 굴뚝 청소를 하는 6살 이하의 아이들이었다. 앞서 소개한 책인 <역사의 원전>에 보면 여전히 불이 타는 난로의 굴뚝을 청소하러 들어간 아이가 굴뚝에 갇혀 산채로 타죽은 사건 기록이 나온다.
"...다리 중에서 살이 많은 부위와 발이 제일 많이 타 있었다. 굴뚝소년들이 움직이는 데 제일 효과적으로 쓰이는 부위, 즉 무릎과 팔꿈치는 뼈까지 타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그 외에도 6살부터 공장에 다닌 여성이 쇠사슬에 묶여 혁대로 맞아가며 중노동에 시달린 끝에 본래 멀쩡했던 몸에 기형이 왔다고 증언한 기록도 있다. 여성과 그 어머니는 공장에 감금되지는 않았지만, 멀리 떨어진 집에서 공장까지 걸어서 출근해서 새벽 5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일해야 했다. 시계가 없어서 2시나 4시에 일어나거나, 공장에 2시에 도착해서 비 오는 가운데 공장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여성은 23세까지 살아남아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할 수 있었다. 그런다고 바뀐 것 없었지만 말이다.
공장에 감금되지 않은 사람들은 현대 주택인 아파트에 살았지만, 한 방에 평균 17명이 살았고, 그마저도 없어 동굴이나 처마 밑, 차도 위에서 자는 이들도 많았다. 20세기에 들어선 1910년, 베를린의 통계국 조사 결과 베를린 인구 3분의 2, 51만 5천호가 인간다운 생활을 못하고 있었다.
"마치 원시인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듯"이란 표현 아래 베르날도 데 퀴로스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동굴에서 살아가는 마드리드의 현실을 고발했다. 도시 근처 구릉이나 산을 쇠붙이로 파서 만든 동굴인데, 호우라도 내리면 급류가 산에서 흘러내려와 그 동굴집을 다 쓸어버려서 인명피해가 났고, 평상시에도 통풍망이 막히는 사고가 잦았다. 그라나다의 국영담배 공장에서는 여성들이 자자손손 노동하는 판이었다. 80년간 일한 백세 노파, 요람에 든 갓난아기, 젖을 먹이는 어머니, 모두 담배공장에 갇힌 셈이었다.
구호원이 있지만 빵 한 조각 먹고 중노동을 해야 했다. 이 모든 현실이 노예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조선의 노비 주인들처럼 서로 결혼시킬 것도 없이, 노동자들을 공장이건 현대주택이건 동굴집이건 한곳에 몰아넣기만 하면 담배공장에서 아기 젖을 먹이는 소녀 노동자는 흔하게 되고, 그 아기 역시 자라서 담배공장에서 일하게 되는 셈이었다.
역사가들은 이를 아동학대가 아니라 아동살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런 일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6학년 때 끌려가 맞으며 일해…이게 강제노동 아니면 뭐냐”
“1944년 5월30일에 마사키라는 교장 선생님과 곤도라는 헌병이 교실로 와서 ‘일본에 일하러 가면 학교에 보내준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몰래 도장을 훔쳐냈습니
www.hani.co.kr
당장 지난 번 포스팅에서 유럽의 전통적 부국인 프랑스와 벨기에의 청년들이 폭로한 현대의 빈곤 문제만 봐도 심각하다.
조선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농민도 집 한 칸 가질 수 있었고, 동굴이나 길거리에 사는 이들도 없었고, 아동이나 여성이 공장에 살며 그런 중노동에 동원되지도 않았다. 왕이라도 백성을 착취해서 사치하면 폭군이라고 쫓겨났다.
바로 그래서 망할 만한 나라, 망해도 싼 나라, 세계에서 제일 비루한 나라가 됐다. 망해도 싼 건 혐한인들 미래고, 제일 비루한 건 혐한인들의 양심이다.
앞서 열거한 나라들, 로마, 게르만, 바이킹, 훈족, 몽골, 무슬림, 남아프리카 해적도 모자라, 자기들끼리 백년 전쟁, 30년 전쟁, 각종 계승 전쟁, 각종 십자군, 각종 종교 전쟁, 그외 각종 학살을 툭하면 일으킨 서구에서는 약육강식 각자도생이 법이었다.
<지들이 약해빠져서> 조선이 강국에 졌다고 식민지 남성성주의자 혐한인들은 조선을 욕하는데, 그 강대국들은 저렇게 약육강식 각자도생해서 강해진 거다. 약육강식 각자도생 끝까지 밀어붙이니 그 두 가지가 극한으로 실행된 제국주의 시대에 혐한인들이 우러러 보는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성들과 아동들 학대하고 착취해서 강해진 나라들은 갓양남의 강대국들이라 궁전까지 화려하다고 우러러 보면서, 그런 거 안 한 나라는 <지들이 약해빠져서> 당한 거라고 피해국 혐오 약자혐오를 해대는 추태야말로 식민지 남성성주의자들과 박노자 같은 어용학자들이 우상숭배하는 PC주의의 본질이자 다양성주의의 민낯이다.
우리가 앞에서 소개한 역사가들이 진짜 역사가들이고, 식민지 남성성주의자들과 박노자 같은 친일친중 둘 다 하는 놀라운 광대 놀음의 다양성 다문화 혐한학자들은 가짜 역사가다. 진짜 역사가들이 강대국의 성장에 얼마나 많은 약자의 희생이 있었는지 분석하는 동안, 박노자며 식민지남성성주의자들은 피해국 조선을 희생해 가해국 중국과 일본의 자국민 여성 노예화와 노예 수출을 은폐한다. 왜? 조선만이 왕이 직접 여성 노예를 위한 법을 제정하고, 권력자라도 여성 노예를 학대한 자를 벌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앙하는 소위 강국, 가해국들이 안 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러면서 자국 여성을 노예 수출해서 부국강병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 노예를 해친 자를 처벌하는 나라나 처벌하지 않는 나라나, 자유민 여성까지 노예 수출하거나, 전쟁에 패해 일부가 공녀로 끌려가는 정도가 아니라 자자손손 자국에서 전원 노예화되는 나라나 똑같다면, 마녀사냥한 나라나 하지 않는 나라나 똑같다면, 아니 하지 않은 나라가 더 나쁘다면, 진보는 무슨 의미가 있고 민주주의는 무슨 의미가 있고 모든 가치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진보며 민주주의를 자가당착으로 내적 파멸시키는 자들이 과연 진보파고 민주주의자인가? 가짜가 아니라?
이것은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 이 시점에서 평소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던 이들이 본색을 드러내고 피해국 혐오와 가해국 우상숭배라는 속내를 더는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 그들이 지향한다고 주장하던 가치들을 스스로 죽이면서 본색을 드러내고도 여전히 그들과 똑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자들에게 떠받들리고 있는 현실을 우리가 꿰뚫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여공들을 학대했다고 하겠지만, 그야 조선이 망할 만한 나라라고 한 이들이 혼자 사는 여자를 마녀라고 불태우긴 커녕 구휼곡 먼저 주고 부역에서 제하고, 여자가 경제권을 쥐며, 여성 노비라도 기본 인권을 왕이 직접 보호하고, 여자 혼자 삯바느질해도 먹고 살 수 있던 조선식 여성 정책을 썩어빠진 나라라고 반대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 갓양남의 강대국들처럼 여성을 다뤘을 뿐이다. 언제는 약육강식 각자도생 안 해서 <지들이 약해빠져서> 망할 만했다는 나라라며 피해국인데도 가해국 죄악까지 누명 씌우며 욕할 땐 언제고 대체 어쩌라는 건가? 물론 이제 와선 또 각자도생이라고 욕해대는 것만 봐도 비판이 아닌 가스라이팅이라 스스로 폭로하는 셈이다.
광명 여성임대아파트 헐린다 | 중앙일보
1970~80년대 서울구로공단엔 섬유·봉제·가발 공장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여기에 다니던 여공들은 방 한 칸에 부엌이 붙은 2.5평 판잣집이 밀집한 이른바 ‘벌집촌’에 몰려 살았다. 정부는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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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여공들을 위해 전용 임대 아파트까지 그 가난하던 시절에 정부 세금 들여 막대한 적자를 보며 세웠고, 많은 여공들이 혜택을 봤다. 그렇게 해봤자, 그런 일 안 한 나라들보다 세계최악여혐국가다. 그렇다면 당장 그런 나라들을 본받아 이주민 정책이고 여성 정책이고 똑같이 해야 <지들이 약해빠져서> 같은 약자 혐오 안 듣는다.
독립 이래 이 악물고 발전한 한국도 사람 갈아넣어서 발전했다고 손가락질당한다. 외국처럼 사람 안 갈아넣었던 시대는 <지들이 약해빠져서> 졌다고 가해국 아닌 피해국 혐오가 들끓는 전쟁 범죄 공범들이 조선은 조선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욕하는 것이다. 중국산 김치 위생 사건 덮으려고 한국산 김치 사건 조작해서 인터넷에 올리고, 중국 욕할 것 없다는 차이니즈 시그니처 댓글도 다는 중국인들 조선족들 수법 그대로다. 모두 한국인 자아도 유전자도 조국도 없다며 한국 멸망하라는 집단이다.
당장 미국만 해도 일론 머스크나 레브친 같은 페이팔 마피아 보면 하루 20시간 일하고 회사에서 잠자며, 추수감사절에 안 나왔다고 일론 머스크에게 혼났다는 경험담이 온갖 책에 줄줄이 나와 있다. 본인들이야말로 공부해서 고치고 바꾸라는 훈계질 자신들부터나 실행해야 한다. 식민지남성성처럼 세계사도 한국사도 논리학도 모르는 무식한 인간들이 쓴 혐한학이나 배우니 뇌가 화이트워싱당해서, 명색이 사회적 약자라는 인간들이 한남유충이니 바텀알바 같은 아동학대를 범하는 사회적 가해자인 사태가 버젓이 일어난다.
불 못 끄는 소방관, 체포 못하는 경찰들이 하도 많아서 공무원 연금 적자가 연간 10억이 넘어 국고로 틀어막는데, 인구절벽이라 긴축재정을 해야 할 판에 인구절벽 해결책으로 다문화가 내세워 지금도 일본보다 인구 대비 많은 공무원 수를 줄이긴커녕 더 늘여서 나라 빚도 함께 늘이고, 이자스민처럼 한국서나 필리핀서나 원주민 차별이나 해대는 다문화 공무원만 채용해대서 중국어 일본어 원어민 교사에 소득세 면제니 각종 세제 혜택까지 주면서 다문화의 경제적 가치니 뭐니 사기치는 공무원들의 나라, 외노자들이 소위 탕핑한다고 실업급여 받으며 고용 보험 거덜내서 국고로 충당해야 하는 가운데, 제재하긴 커녕 사회적 약자니 입원하면 현금 지원한다고 서울시가 지하철에서 선전하는 나라가 사람을 갈아버린다니, 그럼 그 외노자들 출신국 포함한 외국은 아예 사람을 폭파하는 수준이겠다.
하긴 미국이 하면 감탄하면서 한국이 하면 욕하는 인종차별 피해국 혐오 파시즘이 하도 심하니, 공부해봤자 자가당착만 심해지는 게 당연하다. 미국은 AI 혁명을 주도하는데도, 앞으로도 주도권을 잡으려면 더 많이 투자해야 하는데 DEI에 너무 세금 많이 낭비했다고 일론이 정부효율성 부서에서 다 잘라버리는 판인데, 한국은 AI도 없으면서 중앙 정부의 전 부처와 재외동포청과 모든 지자체가 세금 혜택 주고 복지 혜택 주는 세금 다 합치면 어마어마한 돈을 아무 성과 없는 DEI에 낭비하고 있다. 이주민 인권운동가들부터가 정작 자신들은 자국 이주민은 커녕 난민과 소수민족에게도 해주지 않던 혜택 받으면서 받은 거 없다고 난리고 유투버니 방송의 외국인들마다 차별받는다고 불평만 해대는데, 그럼 결국 지금까지 다문화 정책이 세금 낭비였단 소리밖에 더 되나? 다문화에 돈 한 푼 안 쓰는 나라들, 바로 그 혐한인들 출신국들서는 그런 불평 전무한데, 왜 우리만 세금은 세금대로 낭비하고 욕은 욕대로 먹는가? 다문화의 성과라곤 국부유출과 혐한과 한국멸망소취단뿐이다. 인권위와 학계와 언론계와 방송계와 인권단체들이 한국을 인종차별최강국이라며 꾸짖어대는 가장 큰 근거인 인터넷 댓글 실제로 종합해 보면, 제일 많은 게 혐한이자 한국 멸망 소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한국멸망소취단처럼 5프로만 행복하게 살고, 나머지 95프로는 굶어 죽을 판이던 나라를 바라지 않았다. 왕이 사치하면 가난한 선비라도 작두 들고 나가 꾸짖는 나라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나라를 나쁘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들을 올려치며 피해국에 가한 제국주의 만행을 은폐할 수단으로 악용하는 짓은, 그 자체로 악행이다.
지금처럼 가해국 옹호 피해자 이차 가해 공범이면서도 사회적 약자라며 세금은 덜 내지만 복지는 더 받고, 대입이고 취업이고 혜택받는 특권 세력들이야 여전히 5프로만 행복한 나라를 원하니, 한국 멸망 소취를 외쳐대는 것이다. 조선이 망할 때는 물론, 일본이 망할 때조차 위폐를 찍어내, 일본 본토인들보다 더한 이득을 본 세력이니, 인도주의자인 척하면서 실상은 피해국 멸망이란 반인권 파시즘 구호에 중독되는 것도 놀랍지 않다.
아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유럽보다도 훨씬 백성을 존중했던 조선도 구한말 이전부터 중국과 일본의 침략 같은 자신들처럼 고치고 바꾸라는 외국의 시대적 압박 속에서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학생들을 파견하고 외국인력을 초청하고 신식 군대를 정비했던 조선의 근대화 노력을 방해한 두 차례의 열강 전쟁과 펄벅도 케네디에게 직접 비판했던 미국의 협력 조약 배신 같은 악행을 조선에 덮어씌워선 안 된다.
결국 조선은 망할 만한 나라였으니 일제의 잘못이 아니라며 가해국의 죄를 피해국에 뒤집어 씌우는 피해국 혐오이자 이차 가해. 한국인 남녀노소 약자혐오라는 자들이야말로 약자혐오자이기에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것이다. PC주의의 부패가 극심하다는 산 증거니, 그들의 수법인 한국사 날조가 오히려 일본사의 치욕만 들춰내는 자가당착에 이르는 이유다.
<지들이 약해빠져서>란 말, 결국 당한 자가 잘못이다, 약자가 나쁘다는 약육강식의 일본 제국주의와 중국 식민주의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야, 주입된 죄책감 대신 빼앗긴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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